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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책 읽기

외로워서 완벽한 _ 장윤현 / 2012.03.21 / (주) 쌤앤파커스 _ #03

책 속으로...


 실업으로 인한 끝없는 비참함은 계속해서 고통 완화제를 필요로 하며, 그런 차원에서 차야말로 영국인의 아편이다.
차 한 잔이나 아스피린 한 알이 통밀 식빵 한 조각보다 훨씬 나은 일시적 흥분제가 되는 것이다.
『 위건 부두로 가는 길(The Road to Wigan Pier) _ 조지 오웰(George Orwell) 』

 그는 차나 커피에 대한 수많은 글들, 특히 낭만이며 멋을 강조한 책들에서 슬쩍 비켜가기 쉬운 지점, 부러 넘겨 버리는 지점을 이렇게 선명히 짚어주고 있다.  커피나 차는 원래부터 세련, 낭만, 멋과 친했던 건 아니다.  그 옛날, 커피와 차는 힘들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위로제였다.
《완벽한 커피를 천천히 내려주고 싶은 마음.》中...



 마음의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치유를 위해서는 자신의 깊은 상처를 바로 보고 그 부위를 정확히 가늠해야 한다.  그 과정은 매우 아프고 힘들다.  그러나 그 과정을 묵묵히 견뎌내야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

 넘어져서 무릎을 긁힌 아이는 엄마가 소독약을 바를 때의 그 알싸한 아픔조차 견디기 힘들다고 마구 울어댄다.  그렇게 울어 댈 만큼 정말 아프다기 보다는, 내가 얼마나 아픈지를 알아달라 떼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엄살은 어릴 적에나 통한다.
 어른이 되어서, 특히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갖기 위해, 더 편리하기 위해 징징거리는 모습은 심히 꼴불견이다.  어른은 담담히 아픔을 참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어른의 조건은 혹독하고 엄정하며, 그래서 어른은 본질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자기 상처를 담담히 치유하는, 외롭지만 어엿한 어른을 좋아한다.  몇 번쯤 신음소리를 낼 법도 한 처지의 사람이 꾹꾹 고통을 참고 있는 장면을 보면, 마음 깊은 곳부터 흔들려 쉽게 눈을 뗄 수가 없다.  고통을 참느라 애써 센 척, 위악적으로 굴어도 쉽게 미워할 수조차 없다.
《묵묵히 자기 상처를 들여다 보고 견뎌 내는 것.》中...




 나는 그런 로스팅의 과정을 보며 삶과 죽음, 시작과 끝에 대해 생각했다.  가열하지 않은 생두처럼, 살아 있는 모든 생물체는 수분을 포함하고 있다.  그 수분이 몸에서 분리되는 과정이 바로 죽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생두의 죽음이 원두의 시작이 되듯, 때때로 무언가의 끝은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예비하곤 한다.

 극한 마음의 고통 때문에 새로운 시작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때에도, 흐르는 시간은 어느덧 우리를 또 다른 삶의 국면으로 데려다 놓곤 하니까.  그러니 이별로 인해 고통스러워할 때. 우리 너무 절망하지 말자. 생두가 원두가 되듯,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끝은 언제나 시작으로 이어진다.
《끝은 언제나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진다.》中...



 하지만 지나고 나서 돌아 보니 인생은 언제나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었다.  지리멸렬한 시간들, 아무것도 뜻대로 되는 일 없어 답답한 순간들이 있는 한편,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찾아와 내 상상과는 다른 곳으로 멀리 나아간 적도 많았다.

 그 옛날 베트남들이 겪어야 했던 고된 노동과 부족한 상황이 연유 커피를 탄생시켰듯, 힘들고 어려운 시절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가 삶의 비밀을 깨닫게 되는 때는,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 아니라 깊은 좌절에 빠진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배리에이션 커피처럼 인생엔 그렇게 겹겹히 더해지는 맛이 있다.  그리 깔끔하게 떨어지는 맛은 아니지만 쓰고 시고 달고 고소한 맛들이 더해져 풍성한 맛을 선사하곤 한다.  아무리 슬프고 답답한 일들이 겹쳐진다 하더라도, 때로는 그 겹겹이 쌓인 마음들로 인해 새로운 빛이 보이곤 하는 것이다.
 하기야, 삶이 그렇게 계획대로만 흘러가고 깨끗하게 딱 떨어지는 인생살이라면 얼마나 재미 없을까.  삶이 복잡 미묘한 감정과 사건들로 가득 차 있어 우리는조그만 행운에도 신나고 살 맛나는 것 아닐까.  그리하여 빨간 불이 들어와 답답하고 절망에 빠진 순간이면 언제나 나는 배리에이션 커피 한 잔을 곁들인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여러 가지 맛이 어우러져 혀에 감기는 풍미를 느끼며 삶이 또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이 감정들은 또 어디로 흘러갈까 설레는 마음으로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다.
《인생엔 그렇게 겹겹히 더해지는 맛이 있다.》中...




고독...
따뜻한 고독...


차와 커피의 멋과 낭만.
힘들고 외로운 사람들의 위로제에서 출발했다는 커피와 차.

때로는 끝이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새로운 깨달음을 알게 되는 순간은 대부분 끝을 알리는 깊은 좌절에 빠진 순간이다.

미리 알 수 없고, 복잡한 삶 덕분에 작은 행운에도 행복해 질 수 있다.


삶에서...
수시로 맞이하게 되는 좌절을 느끼게 되는 끝 부분에서 고독은 새로운 시작을 깨달게 해주는 위로제이다.
잠시 나를 떠나서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다. 
따뜻한 고독이다. 

커피의 맛과 향이 함께하는...

_ 2014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