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삶의 두 번째 여행.
◆ '또 한 번 산다면 멋지게 살 수 있을까?' 중...
세월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면 사람들은 현자가 된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꿰뚫는 현자는 아니어도 최소한 자신의 인생에서는 현자가 된다.
자신이 살아온 궤적에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알게 되는 눈이 생긴다.
마치 천리안을 갖게 되는 것과 같은데, 아쉽게도 그 천리안은 미래를 보는 천리안이 아니라 과거를 보는 천리안이다.
누구나 살면서 끊임없이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서 생기는 실수만큼 후회를 한다.
살면서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실수가 없는 삶은 없기 때문이다.
평생의 삶은 말 할 것도 없이 오늘 하루만 봐도 확연히 드러난다.
정말 아쉬운 것은 그런 것들은 꼭 시간이 지나서야, 적지 않은 나이가 되어서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결과를 되돌릴 수 없다.
그런 실수들은 작은 역사가 되어 과거로 굳어져 버렸다.
그래서 후회는 항상 늦는다는 말은 언제라도 명언이다.
나이 들어서 찾아오는 진한 후회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한다.
만약에 지금의 깨달음을 가지고 인생을 한 번 더 살게 되면 그때는 진짜 멋진 삶을 살지 않을까?
단언컨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나이에 맞는 본성이 있고 지식보다 본성에 끌린다.
아이는 공부보다 노는 게 더 좋고, 청년이 되면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 눈 앞의 여자에 더 끌리게 된다.
아무리 알고 있는 게 많은들 대부분 본성을 넘어서지 못한다.
'버나드 쇼'의 유명한 묘비명은 이럴 때 유용하다.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웃음이 나면서도 무릎을 치게 만든다.
길고 긴, 수 많은 사연이 담긴 사람의 삶을 이렇게 한 마디로 축약한 문구는 정말 드물다.
게다가 재미까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문구 한 줄에 웃음을 터뜨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그 속에 담겨 있어서이다.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는 잠시 멈추고 한 번 더 생각을 해 보자.
'많은 시간이 지나서 이 선택을 어떻게 떠 울리게 될까?'
물론 후회없는 선택은 없겠지만 미래를 내다 보는 선택이 모여 일생이라는 현실을 만든다.
지나가 시간이, 지나간 선택이 후회스러울수록 남아 있는 시간은 축제처럼 만들어야 한다.
◆ '끝이라고? 시작해 보지도 않았잖아.' 중...
그때 내게 꿈이 생겼다.
의료진이 24시간 환자를 가족처럼 보살피는 병원.
콘크리트 빌딩에 환자가 갇혀 있는 병원이 아니라 마치 내 집 같은 목조주택에서,
푸른 잔디와 오솔길을 거닐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작은 병원을 만들어야겠다는 꿈 말이다.
나는 그 길로 우리가 살던 시내의 아파트를 팔고 일산 외곽에 토지를 구입해 목조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성석동에 있는 푸르메 마을이었다.
마을길과 집 현관을 데크로 연결했고 집 안의 문턱을 없애 휠체어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설계했다.
나는 장애인에게 편리한 집은 비 장애인에게는 더 편리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백경학 《효자동 구텐 백》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늙는 것이 아니라 꿈을 잃어버릴 때 늙는다.는 맥아더의 말대로라면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의 구분은 아주 명확하다.
꿈을 밀고 나가는 사람은 젊디 젊은 것이고, 꿈을 버린 사람은 늙어도 한참 늙은 것이다.
'너무 멀리 왔다.'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쓰는 말처럼 보인다.
꿈을 꾸기에는, 꿈을 힘의 원천으로 삼기에는 너무 멀리 온 나이.
그러나 너무 멀리 왔다고 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가 40대이기도 하다.
마흔이 넘어 섰다고 해 봐야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인생의 중간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런 나이에 '너무 멀리 왔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늙는 것이 아니라 꿈을 잃어 버릴 때 늙는다.'는 말에 흠칫 놀라는 것은 그들이 아직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서이다.
나이 든 남자는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젠 끝난 걸까?"
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생활만 남은 삶은 모든 것이 끝난 듯 보인다.
아쉽지만 안따깝지만 이제 끝난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선다.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도 젊은 그들은 그래도 아쉬워 자꾸 되 묻는다.
"이젠 끝난 걸까? 정말 그런 걸까?"
꿈은 어느 나이나 어느 누구에게나 진행형이다.
너무 멀리 온 나이는 없다.
잊어 버리고 모른 체 하면서 살아 왔을 뿐이다.
어느 '나이 든 소년'이 의문을 품고 물어보면 이렇게 답해야 한다.
"끝이라고? 시작해 보지도 않았잖아."
◆ '떠나라, 파티가 시작된다.' 중...
쏟아지는 일에 종종걸음을 치다 잠시 한숨을 고를 때,
숨쉴 공간조차 마땅치 않은 도시에서 간신히 숨을 몰아 쉬며 생계를 이어 나가는 일에 지칠 때,
술을 마시고 늦은 밤 급한 마음으로 버스를 향해 달릴 때 문득 문득 떠나고 싶었다.
떠나고 싶다고 아무 때나 떠날 수 있다면 애초부터 목마름은 없었을 터.
떠나지 못하는 현실은 목마름을 산처럼 쌓아 놓았고,
그 목마름에 물 한 방울을 뿌려 주지 않는다면 몸과 마음은 심한 가뭄 때의 논처럼 갈라져 버릴 기세였다.
아예 논사가 힘들 정도로 논이 갈라지기 전에 물을 뿌려 주어야 했다.
그러려면 떠나야 했다.
그래서 떠났다.
마흔의 남자가 홀로 떠난 여행은 자유라는 선물이었다.
그리고 작은 도전이었다.
정해진 목적지가 없으니 급할 일도 없었고, 길을 가다가 이정표를 보고 갈 곳을 정하기도 했다.
홀로 다닌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었지만 즐거운 일이었고 신나는 일이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여행일 뿐.
그저 혼자일 뿐.
그것뿐이었다.
그것은 여행이었고, 자유였고, 선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만을 위한 작은 파티였다.
당연히 그런 것은 없다.
그런 깨달음이 있다고 한들 그 깨달음을 얻으려고 간 것도 아니었다.
그저 떠나 보고 싶었고, 그저 떠났다가 돌아왔다.
푸른 나무처럼 젊었던 시절같이 자유로운 며칠을 누려 보고 싶었다.
잘 놀고 왔을 뿐이다.
즐겁게 혹은 신나게 혹은 외롭게 말이다.
한 가지 깨우친게 있다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더라는 것이다.
자유로웠고 짜릿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 '삶은 스스로 행복해 지지 않는다.' 중...
흔히들 말한다.
좋은 날이 오겠지.
내년에는 좋은 일이 생길거야.
좋은 일이 생겼으면 하는 기대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우리 주변을 떠 돈다.
주변을 떠 돌던 그 희망이라는 이름은 생활에 지쳐 한 발짝도 움직이기 싫은 우리를 끌고 가기도 한다.
가끔씩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끌려 가듯 움직이는 것은 그때 잠깐뿐이다.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면 삶은 여전히 거기서 거기다.
희망은 듣기 좋은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삶은 절대 스스로 행복해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안전적으로 살고 어느 정도의 부유함도 누리고 살 줄 알았지만 나이가 들 수록 삶은 더 힘들어졌다.
삶은 때가 되면 스스로 행복해지는 줄 알았던 게 착각이었다.
그래서 나이를 먹고 모인 친구들은 이렇게 말한다.
"정말 이럴 줄 몰랐다."
삶은 우리에게 배신자였다.
우리는 어떤 것을 이루고 소유하면 지속적인 만족이 보장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행복의 가파른 절벽을 다 기어 올라가면 넓고 높은 고원에서 계속 살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고 싶어한다.
정상에 오르면 곧 불안과 욕망이 뒤엉키는 새로운 저지대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드물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불안》알랭 드 보통.
지나친 또는 끊임없는욕망은 불안을 부른다.
삶에 속았다고 여기게 만든다.
젊어서 그린 그림 속에 어떤 것이 남아 있고 어떤 것이 지워졌는지 이제는 알 나이가 되었다.
그림 속의 어느 부분이 비어 있다고 아쉬워 할 이유도 없다.
그림 속의 한 부분을 여백으로 남겨 두어도 그림은 나름대로 작품이 된다.
세상의 모든 작품은 그렇게 완성이 되는 것이고, 세상의 모든 삶은 그렇게 하나의 작품이 된다.
삶은 하나의 작품이고 우리는 지금 작품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 '욕하면 지는거다.' 중...
거의 욕이다.
그놈 때문에 하루 하루가 괴롭다는 그는 술을 마시든 안 마시든 입에 그놈에 대한 비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다 보니 다른 말을 할 때도 습관처럼 그런 말투가 입에 붙어 버렸다.
표정은 또 어떤가?
무표정과 찡그림의 중간이 고유의 얼굴처럼 되어 버렸다.
남을 욕 하느라 자기가 더 괴로워졌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경우 이런 말이 제격이다.
'욕하면 지는 것이다.'
나는 한참 후에야 사람들이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100명 중 99명은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나는 이 세상에서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비난이란 쓸데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비판은 인간을 방어적 입장에 서게 하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정당화되도록 안간힘을 쓰게 만들기 때문이다.
비판이란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인간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그의 자존심에 손상을 주고 원한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표정, 억양이나 제스처를 통해 말로 하는 것만큼 확실하게 다른 사람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그들에게 틀렸다고 말 한다면 그들이 과연 당신에게 동의 하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들의 지성, 판단, 자만심 그리고 지존심 모두를 직접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도 당신에게 반격을 가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마음 따위는 염두에도 없다.
칸트나 플라톤의 솜씨를 모두 동원해서 설명을 해도 상대방의 의견은 변하지 않는다.
데일 카네기 《카네기 인간 관계론》
기분이 나빠지면 누가 손해인가?
결국 자신만 손해다.
그런 손해를 스스로 끌어 안고 있을 이유가 없다.
'욕'하면 지는 거다.
결론은 간단하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감정은 일으키지 말고 다시 생각한다.
◆ '지금 우리는 사랑일까?' 중...
세상의 어떤 경험보다 짜릿한 신혼이 지나면서 싸움은 불연속적으로 생겨났다.
두 사람이 맞추어 가는 과정을 겪으면서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이 옳은 말이구나 싶다가도 이러다 칼로 두부 베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신혼은 달콤했지만 삶은 그렇지 않았다.
때때로는 달콤하고 짜릿했지만 그보다 더 긴 시간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뜻밖에도 살아 갈수록 삶은 피곤하고 누추해졌다.
웃음과 여유보다는 한숨과 분노가 앞섰다.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게 두 사람의 사랑일 줄 알았다.
때로는 그렇기도 했다.
그렇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기도 했다.
이제 적지 않은 시간을 지나 도착해 있는 이 시점, 오래된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 걸까?
이 나이에도 삶에는 꼭 갖고 싶은 멋진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공짜로 바라는 내 태도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비에 젖은 솔 내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 향기와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을 내 놓아야 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눈매"를 사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눈매를 주어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물물교환'의 법칙을 잊고 살았습니다.
치사하게 내가 준 것만 조목조목 값을 따지고, 공짜로 얻은 것은 당연히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내겐 당신이 있습니다.
내 부족함을 채워주는 사람... 당신의 사랑이 쓰러지는 나를 일으킵니다.
내게 용기, 위로, 소망을 주는 당신, 내가 나를 버려도 나를 포기 하지 않는 당신.
나를 사랑하는 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커다란 힘 입니다.
당신이 존재하는 내 운명, 제왕과도 바꾸지 아니 합니다.
장영희 《생일》
어린왕자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숨기고 있기 때문야." 라고 말한다.
"그래. 집이든, 별이든, 사막이든 그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지."
어린왕자의 말에 대답을 한다면 이렇게 말해야 하리라.
"생활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사랑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확인하는 것보다 쌀독을 먼저 확인하는 게 생활이지만, 그 지점까지 내려간 현실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사랑의 힘이다.
◆ '노동의 종말은 이미 예고 되었다.' 중...
노동의 종말은 누구나 예상하고 있다.
직장에서 이루이지는 노동이 그 옛날처럼 평생토록 이어지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노동의 종말이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지 않다.
마흔에 들어서면 직장인들은 노동의 종말이 오는 시기를 가늠해 본다.
그러면서 그것이 자기의 것이 아니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 하루 하루를 산다.
희망을 가진다기보다는 애써 모른척 한다.
다른 사람은 그 대상이 되어도 자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이다.
문제는 그 파도에 휩쓸려서 직장에서 노동을 멈추어야 하는 사람이나,
파도를 피해서 살아 남는 사람이나,
그 선택권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선태권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 그 말은 틀린 말이다.
직장에서 노동의 종말을 맞이하는 시점은 개개인이 선택할 수 있다.
원한다면 지금 속해 있는 조직을 떠나서 자신이 원하는 다른 노동을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종말을 스스로 선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대로 남아 있겠다면 선태권은 넘겨 줘야 한다.
그때부터 선택권은 없다.
선택 되어지는 일만 남는다.
'직장 이후'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과정이다.
누구나 알고 있고, 뻔히 보이는 삶의 구도이지만 당사자들은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 그 시점이 눈 앞에 올 때까지 지켜만 본다.
목전에 닥치면 몸과 마음이 바빠지지만 특별힐 방안이 있을 리 없다.
파도가 덮쳐 오면 휩쓸려 갈 뿐이다.
'직장 이후'에는 생각을 확장 시켜야 한다.
'직장 이후'에는 자신만의 일을 찾아야 한다.
자신만의 노동, 자신만의 일이라는 개념은 더할 수 없이 막연하다.
그게 무엇인지 알기도 힘들다.
그러나 직장 이후는 그런 막연함 보다 훨씬 막연할 게 분명하다.
생각해 보지도, 준비 하지도 않은 직장 이후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은 터널이 될지 모른다.
누구도 '직장 이후'를 피할 수 없지만 준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음이 없는 것이다.
마음이 있다고 하면 행동할 의지가 없는 것이다.
마음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으면 결과는 같다.
아무것도 없다.
◆ '잔칫날 먹자고 석 달을 굶는 사람' 중...
"언제나 니가 알아서 챙길래?"
아이의 짜증을 받은 아내는 두 번에 한 번 정도는 같이 짜증을 낸다.
아이의 짜증은 그대로 스트레스가 된다.
아내는 아이가 빨리 자라서 제 스스로 알아서 자기 일을 챙겼으면 한다.
"저 애가 언제 크나?"
아이와 충돌이 있을 때마다 아내가 하는 말이다.
아이의 준비물을 챙기면서 아이와 내일 일을 이야기하고,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면서 같이 부대끼고,
티격태격하면서 여행지를 결정하는 지금이 바로 빛나는 시기이다.
어떻게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나 하고 생각하다가 막상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면 남는 것은 후회 뿐일 게 분명하다.
별것도 아닌 시간을, 별것도 아닌 순간을 즐기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잔칫날 먹자고 석 달을 굶을 수는 없는 일이다.
먼 훗날에 잔치가 열릴지 안 열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별것도 아닌 산책, 별것도 아닌 요리, 별 것도 아닌 짧은 여행은 그래서 항상 즐겁다.
인생이란 이론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넷도, 다섯도 될 수 있으며,
혼심을 다해 노력했지만 하나 그대로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일이 잘 되었어도 자신의 공이 아니라 아마도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며 마음 편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노 아야코《중년 이후》
'바람개비 > 책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흔 살의 책 읽기 / 유인창 _ Epilogue (0) | 2014.03.17 |
---|---|
마흔 살의 책 읽기 / 유인창 _ 4.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0) | 2014.03.13 |
마흔 살의 책 읽기 / 유인창 _ 2.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0) | 2014.03.11 |
마흔 살의 책 읽기 / 유인창 _ 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0) | 2014.03.10 |
마흔 살의 책 읽기 / 유인창 _ 바다 출판사, 2011월 3월 2일 출간. (0) | 2014.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