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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책 읽기

마흔 살의 책 읽기 / 유인창 _ 2.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2.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 '네레데? 네레예?' 중...

바다 같은 시간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걷히는 어둠을 바라보며 솟아 오르는 것은 분노였다.
분노가 지나간 자리에는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이 꼴이 무언가?
시간을 버려야 하다니.
목적하는 삶이 없어서 시간을 버려야 하다니.
허망함과 분노가 몰려왔다.

마흔의 삶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홀로 외로이 걷는 여행은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만들고,
육체의 제약에서 그리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안락하게 사고하던 스스로를 해방 시킨다.

순례자들은 아주 긴 도보여행을 마친 후에 거의 예외 없이 변모된 자신의 모습을 느낀다.
이는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스스로를 직면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발견할 수 없었을 자신의 일부를 만났기 때문이다.


더 이상 마흔을 소파 위에서 뒹굴며 지내지는 않을 것이다.
실크로드에서 사람들이 묻던 인사를 스스로에게 던질 것이다.

네레데?_nerede? 어디서 왔는가?
네레예?_nereye? 어디로 가는가?



◆ '아는 것은 힘이 아니다.' 중...

'프랜시스 베이컨_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은 틀렸다.
그 말이 시대를 이어 오는 명언이기는 하지만 그 의미에 별로 공감하고  싶지 않다.
베이컨은 철학적 판단을 내렸지만 생활적 판단에서는 또 달라진다.
그 말은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

'아는 것은 힘이 아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하지 않은 영향은 죽을 때까지 미친다.
사회에 나와서도 책을 읽으면 어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알고,
지금의 몸 상태가 이러저러 하니 운동을 해야 한다는 걸 느끼고,
나중에 어떠한 자리에 가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절적히 깨닫지만 그냥 지나간다.

그렇게 살아 온 결과의 누적이 지금의 모습이다.
알고 있는 대로 살았더라면 지금 삶의 모습은 아주 많이 달랐을 것이다.

몰라서 못한 것은, 별로 없다.
알고 있지만 하지 않았다.
결국  아는 것은 힘이 아니다.
힘이 되는 건 '아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다.


마흔 즈음이 되면 언제 무엇을 했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삶의 누적이 주는 깨달음이다.

그제서야 알았다고 하겠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그제서야 안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몰랐던 것이 아니라 행하지 않은 것이다.


역사는 윤회한다고 말한다.
역사가 윤회하는 것은 역사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실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도 마찬 가지이다.
자신의 역사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따라서 개인의 삶도 윤회한다.

죄절과 후회를 불러오는 윤회다.

예전과 다르지 않게 살아가는 윤회의 대가는 시간의 상실이다.

시간의 또 한 가지 특징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부여된다는 것이다.
시간이 자본이고 자원이고 기회인 것은 시간이 가지고 있는 그런 특성 때문이다.

이렇게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얻은 막대한 자본과 자원과 기회를 그냥 흘러 보낸다.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게 또 하나 있다.
버려지는 시간과 같은 바구니에 담겨서' 삶'도 버려진다.


'반복해서 일어나는 위기는, 결국 우둔함과 나태의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는 피터 드러커의 말은 가슴에 와서 툭 얹혀 버린다.

드러커의 말대로라면 우둔함과 나태에 지배 당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다나 몰라서도 아니고 알면서 팽개쳐 둔 결과로 인해 위기가 일어난다.

그렇게 마흔 즈음까지 살아 온 것이고 또 그 이후에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느끼고 배운다.
책에서 배우고, 사람에게서 배우고, 자연에서 배운다.
일을 하면서 배우고, 공부하면서 배우고, 후회 하면서 배운다.

아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세상 그 누구나 그 만큼은 안다.
많이 배웠다고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삶의 배움에는 학벌이나 학력이 무의미 하다.

문제는 누가 움직이느냐이다.
알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모르는 것과 같다.


생존과 경쟁이 트렌드가 되어 버린 사회의 논리로 따진다면 움직이는 자가 이긴다.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몸으로 움직여야 한다.
부딪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게 진정한 답이다.

마흔이 넘어선 나이에는, 말로만 생각하고 계획표만 짜는 젊은 시절의 실수를 되풀이 할 만큼 시간이 많지 않다.

실행하는 것이 힘이다.
실행력의 차이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 '우울해 하지 말아라, 친구야.' 중...

'세월에 장사 없다.'는 말은 절대 진리다.
그런 절대 진리 앞에서 평범한 한 사람이 어찌 회한이 없을까?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다.
도대체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이 나이까지 살면서 해 놓은 것이 무얼까?

돈을 많이 벌은 것도, 그럴듯한 명예를 쌓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대단한 사회적 지위를 만들지도 못했고, 권력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도대체 무얼 하고 살았나 하는 생각이 몰려온다.

후회스럽고 기분이 울적해진다.
그 긴 시간 동안 해 놓은 것이 이렇게 없다니...

그렇지만 한번 생각해 보자.
정말 그렇게 해 놓은 게 없는 것일까?

돈이 풍족할 만큼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지도 않다.

남들 만큼 잘 먹이지는 못했지만 가족들 굶기지 않았고,
남들처럼 좋은 학원은 못 보냈지만 아이들 교육도 시킬 만크은 벌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대단한 일이다.

몸뚱이 하나 지니고 세상에 나와 물려받은 것 하나 없이 살아왔다.
몸뚱이 하나만으로 태풍 부는 바다보다 험하다는 세상을 헤치고 살이왔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러니 친구야, 우울해 하지 말아라.


남들이 말하는 명예는 얻지 못했지만 남을 해하고 살지는 않았다.
주변에서 나쁜 평도 듣지 않았고 손가락질 받는 삶을 만들지도 않았다.
이익을 챙기려고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았다.
나름대로 의미 있게 살았다.
자랑스러울 것도 없지만 부끄러울 것도 없는 삶을 만들어 왔다.
삶이 부끄럽지 않은 것보다 더 큰 명예가 무엇인가?

그러니 우울해 하지 말아라, 친구야.


다시 생각해 보니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이미 우리가 지니고 있다.
그것이 모자라고 부족해 보이는 것은, 그래서 우리가 우울해 지는 것은 다른 이유일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욕망의 다른 모습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지.
물론 욕망은 삶을 이끌어 가는 동력이다.
그러나 삶 자체가 욕망에 끌려 다니는 건 그리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지나친 욕망의 추구는 어디에선가 삶을 부족하고 황폐하게 만들어 버린다.


다시 힘내서 살아보자.
열심히 살았던 여태까지처럼.
허무하게 살지 않았던 여태까지처럼.

우울해 하지 말아라, 친구야.



◆ '날자, 내 인생 두 번째 꿈.' 중...

'인생의 비극이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달성할 목표가 없는 것이 진정한 인생의 비극이다. 목표 달성에 실패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다. 그러나 달성할 목표가 없는 것은 치욕이다.'_나탈리 뒤 투아.


당신에게는, 나에게는, 그런 꿈이 있는가?
도달하고자 하는 꿈이 있는가?
달성할 목표가 있는가?


캠벨_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귀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거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첫 번째 꿈은 삶에 끌려 다녔다.
삶은 해보고 싶은 일도 못하게 만들었다.

두번째 꿈은 남은 삶을 끌고 다니게 하고 싶다.
뜻대로, 생각대로 한번쯤은 살아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 보지 못하고 살았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내 인생 두 번째 꿈을 키운다.

달성할 목표가 있으면 삶이 비극적이거나 초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꿈에 도달하지 못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또 어떠리.


밥벌이에 한쪽 다리를 빼앗긴 사람들도 이제는 안다.
그래도 일어 설 수 있다는 것을.
그래도 똑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을.
그래도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을.



◆ '인생 최대의 작전, 명문대 보내기.' 중...

나와 남편은 공부를 많이 한 편이지만 공부 덕분에  부귀영화를 누려 본 적도 없고, 또 부귀영화가 없다고  해서 불행하게 느낀 적도 없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학력에 대한 강박관념이 적다. 그래도 그렇지 우리도 초보 부모인데 자식의 앞날이 불안하지 않을 리가 있나?  그렇지만 아이들의 성적에 참견해 아이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관리하는 방법을 터득할 기회를 앗을 수는 없다. 자녀  교육의 긍극적잇 목적은 부모의 도움으로 잘 사는 게 아니라, 부모의 도움없이 잘 사는 것이기에.

우리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이 우리 품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고유한 특성과 재주를 스스로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그간 열중해서 노는 와중에 자신이 원하는 것,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계발해 왔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내 아이들이 그렇게 중대한 과업을, 그 나이에, 자기 힘으로 이룩했다는 자신감을 안고 세상으로 걸어 나가 어렸을 때 자긍심 지수를 학교 성적에 두지 않았듯이, 커서도 행복 지수를 부귀나 영화에 두지 않는 현명하고도 소박한 인생을 살기를 기원한다.

무엇보다도 존재의 기쁨을 경쟁력으로 평가해 소중한 인격체를 부품으로 전락하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자식을 낳아 기르는 목적은 세상에서 부리기 쉽도록 획일화된 일꾼을 양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획일적으로 찍혀 나와 사궁이에 던져져 엔진을 돌리는 연료가 아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인생을 잘 살아내기 위해 고유한 열정을 싹 틔워 올리려는 아이들의 절박한 몸짓을 모른 체 해서야 되겠는가?

임혜진
《고등어를 금하노라.》


아이의 교육과 삶을 생각할 때 최종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행복과 만족이어야  하리라.

저 아이가 나중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

그 삶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어떻게 해야 그 삶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게 해 줄 수 있을까?


정답은 없다.

행복의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을 졸업시켜 아이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
경쟁구도 속에서 기약 없는 질주를 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두 가지 모두 부모의 마음이다.

결국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은 많은 무리가 몰리는 곳이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에 있어야 마음이 편해진다.
너도 나도 학군 좋은, 좋은 대학교를 많이 간다는 곳으로 이사를 가고 그 테두리에서 튕겨져 나올까봐 노심초사 한다.

원하는 것은 자신의 아이들이 명문대에 들어가고, 명문 대학 졸업장을 받아서 남보다 훨씬 잘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훨씬 나은 사람, 훨씬 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보다 좋은 점수를 맞아야 한다.

경쟁은 경쟁을 부르고 마침표도 없는 질주를 한다.

끝도 없는 경쟁속에서 부모는 시소를 탄다.
한 쪽은 철학이, 한 쪽은 현실이 자리 잡고 있는 시소다.

살아보니 답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은데, 이게 답이라고 자신있게 말해 주지 못한다.

부모는 그래서 오늘도 시소를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