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흔의 딜레마, 뛰어 내릴까? 돌아설까?' 중...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
익숙한 것을 버릴 것인가? 변화를 찾아 나설 것인가?
마흔의 딜레마(Dilemma)는 여기서 시작한다.
어려서부터 학교 교육을 마칠 때까지의 제도적인 배움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사회의 구성원으로 연습을 시작한다.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면서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이 어떤 것인가 윤곽이 잡히는 게 이때쯤이다.
제도적인 교육을 마치고 세살살이의 슬픔과 기쁨을 어느 정도 겪으며 체험과 생각이 쌓이고 쌓여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 준다.
그래서 마흔 즈음의 나이는 변화하기에 가장 좋은 나이가 되기도 하며 벼랑 끝으로 달려와 뛰어내리기를 고민하는 것도 마흔 즈음이다.
이들이 부여잡고 있는 것은, 놓치면 당장의 삶이 위협받을 것 같은 익숙한 것들이다.
그 익숙한 것들을 꼭 잡고 있는 것도, 그 손을 놓아 버리고 벼랑으로 달려가 뛰어 내리는 것도 자신의 몫이다.
설사 뛰어 내리지 못하고 딜레마에 빠져 나오지 못한다 해도 잊지는 말아야 한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걸.
그리고 언제라도 나의 삶을 꿈 꾼다는 걸.
◆ '살아 있으면서 죽은 당신' 중...
만일 내가 더 살도록 선택 받았다면, 난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가?
모든 것이 그러하듯 삶의 형태 역시 선택이다.
아침마다 괴로운 마음으로 잠에서 깨고, 어떤 일을 하든 괴로워 하며, 날마다 불평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삶이 힘들다고 가족들과 불화를 만들며 살 수도 있다.
그렇게 날마다 스스로를 괴롭히며 산다면, 원하지 않았지만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사람이다.
살아 있으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하려 하지 않으니 죽은 사람과 같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가르쳐 주는 가장 놀라운 배움 중 하나는 불치병 진단을 받는 순간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 진정한 삶이 시작 된다.
당신은 죽음의 실체를 인정하는 순간, 삶이라는 실체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 둔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모든 날들을 최대한으로 살라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다면 이 세상을 더 이상 살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이 하지 못할 것들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언젠가 나도 당신도 내일을 그리고 모레를 살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언젠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순간이 올 때까지의 시간뿐이다.
◆ '이상하고 슬픈 인종, 남자' 중...
간단하다.
가장 큰 잘못은 돈을 벌지 못했다는 것이다.
많이 벌지 못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모든 이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건 돈이 되었다.
남자도, 여자도 무조건 돈을 원한다.
그것도 많이, 많이, 더 많이 원한다.
그런 시대에 돈을 벌지 못했다는 건 큰 죄다.
그런 상태로 나이까지 먹어서 기회마저 남겨 놓지 않은 지경까지 몰고 갔다는 것은 용서 받기 조차 힘들다.
돈으로 끝나지 않는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를 잘하지 못한 게 죄였다.
학교를 마치고 나와 취직을 하니 변변치 않은 직장을 잡았다는 게 죄가 된다.
월급을 받으니 월급이 그것밖에 안 된다고 죄인처럼 취급한다.
결혼을 하니 이번에는 아내에게 그렇게 밖에 못하느냐고 지청구가 들어온다.
아이가 생기니 아빠로서 아이에게 무얼 해 줬느냐고 한다.
아이가 자라니 남들은 다 하는 과외는 커녕 학원도 제대로 보내 주지 못한다고 한다.
다시 돌아보니 잘못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렇게 많은 잘못을 해 놓고 뻔뻔하게도 잘못이 없다고 한다면 어디선가 돌이 무더기로 날아올 판이다.
그런데 그 말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 것이다.
그 안에서, 그 세월 속에서 나는 땀을 흘렸고 눈물도 흘렸고 노력도 했고 밤을 새워 고민도 했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게 오늘의 모습이다.
그 모습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해도 그것은 여태까지의 삶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
그 산물을 보고 잘못 됐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동안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노력했는지,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얼마만큼의 눈물을 쏟았는지 모르면서, 단지 지긍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고 모욕하지 마라.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마라.
말 한마디에 상처받은 남자는 삶이 슬퍼진다.
삶이 슬퍼진 남자는 더 외로워진다.
그렇게 질책하지 않아도 남자는 외롭고 힘들다.
그저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죽어갈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종.
남자라는 건 정말 이상하고 슬픈 인종이다.
남자의 삶은 항상 부족하다.
여자의 삶이라고 차고 넘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남자는 특히 부족했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 그것 하나로 남자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그 무게에 짓눌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허덕거리는 게 남지들의 삶이다.
살아가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는 '누구랑 함께 갈 것인지' 묻지 않았다.
삶은 시간이 가는대로 그냥 사는 것이고 시간은 여때까지 그저 흘러왔다.
이제는 질문을 해야 한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누구랑 함께 갈 것인지.
"남자들에게는 돈을 벌고, 쓰고, 좋아하지도 않은 기계속의 톱니 바퀴와 같은 삶을 사는 것 보다 이상의 삶이 있다."는 말을 믿고 싶다.
◆ '잃어버린 얼굴을 찾이 드립니다.' 중...
'링컨_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현대에서는 효용가치가 크게 떨어질지 모른다.
거짓 표정과 거짓 웃음이라는 가면으로 얻어 내는 건 적당한 일상의 평온이다.
적당한 돈, 적당한 자리, 적당한 체면, 적당한 위치, 적당한 지위.
그것을 잃지 않으려면 틀을 벗어나기 힘들고 가면을 벗어 버릴 수 없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말은 정확하다.
미래와 생계에 대한 불안은 사람을 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맨 얼굴을 가리고 가면을 쓰게한다.
밥은 불안이고 그 불안은 사람을 잠식한다.
결국 밥이 영혼을 잠식한다.
'세익스피어_ 인생은 연극이다.'라는 말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세상은 무대이고 우리 삶은 연극이라는 틀 안에서 썩 훌룡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충실한 연기를 하다 보니 삶 자체가 진짜 연극이 되어 버린다.
링컨이 말한 '스스로 얼굴을 책임질 나이'가 되면 어딘가에 숨겨 논 내 얼굴을 찾아 나서야 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뛰어 내려 와야 한다.
마흔.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직장과 가정을 위하여 스스로를 버려야 하는 나이.
사회에서 또는 가족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나이.
이런 현실에서 마흔 즈음의 삶은 무겁다.
삶이 무거울 수록 자신의 모습은 더욱 찾기 힘이 든다.
무거운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는 마흔 즈음의 삶은...
연극이다.
살아있으면서 죽은 삶이다.
더불어...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나이도 '마흔 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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