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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책 읽기

마흔 살의 책 읽기 / 유인창 _ 4.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4.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 '너의 웃음, 너의 행복.' 중...

자신에게 찾아오는 즐거움을 누리면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대부분 착각이겠지만 자신보다 훨씬 행복할 거라고 상상하는 사람들과 비교하는 버릇은 버려라.

이렇게 한다면 당신은 질투에서 벗어날 수 있다.

- 《행복의 정복》 버트런드 러셀.




이제 시작일 것이다.
이제 재활병원으로 옮기면 기약도 없는 시간을 보내야 하겠지.

회복이 될지 안 될지,
된다면 어느 정도까지 회복이 될지 아무도 확약도 없는 재활훈련을 해야 하겠지.

그럼에도 녀석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더구나 그렇게 활짝 웃는 모습은 전에는 보기 힘들었다.


그 깊은 절망 속에서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보았기에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일까?

한쪽 팔과 다리가 조금 움직인다는 것일까?

의사의 말로는 신체마비로 재활훈련을 하던 사람들이 휠체어를 잡고 일어 서는 순간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이해가 된다.
그들에게 그만한 행복이 어디 있을까?

그래도 이해가 쉽지는 않다.
그런 상황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말이다.

그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침대에 누워서 활짝 웃는 후배의 웃음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불과 몇 시간 전에 병원을 나오면서 일행중 누군가가 '아무 문제 없이 걸어 다닐 수 있으면 행복한 것'이라고 말 했을 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 되었다.

아무 문제없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우리들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서로 확인 했기 때문이다.


행복의 모습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리고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자신의 상황에 따라서, 또는 생각에 따라서 언제든지 모습을 바꾼다.

어제는 불행했던 것이 오늘은 갑자기 행복이 되고,
어제는 행복이었던 것이 오늘은 불행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아 왔다.

흔하지 않지만 드문 일도 아니다.
어렵지  않게 겪는 일이다.
그것이 세상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다시 생각해 보자.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무엇이 나를 불행하게 하는지.
왜 내가 행복하지 않은지, 왜 내가 행복한지를 생각해 보자.

행복에 관해서는 아무도 답을 주지 못한다.
결국 내가 만들어 갈 수 밖에 없다.

답이 나온다면 잠깐이라도 답대로 살아보자.
그게 정답인지 오답인지는 겪다 보면 스스로 알 수 있다.

정답이라면 잠시의 시간이나마 행복하게 살게 된다.
자신의 행복을 찾을지도 모른다.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답을 만들기 위한 고민을 해 보아야 한다.

어느날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병원에 누워 '아, 그게 행복이었구나'하고 알게 된다면 너무 늦다.



◆ '돈만 벌다가 죽기는 억울해' 중...

돈만 벌다 죽을 게 뻔해서 억울한 현실과 가슴 뛰는 일을 하라는 이상론은 접점이 없어 보인다.

돈만 벌다 죽을 것 같아서 억울하다고 말하던 그는 가슴 뛰는 삶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가슴 뛰는 삶이 없는 그는 그래서 더 억울하지 않을까?

두 삶의 차이는 어디서부터 생겨난 것일까?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가슴 뛰는 일을 찾아 나서기에는 너무 멀리 온 것처럼 보인다.


"지금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있느냐?" 고 묻는다.

그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할 수가 없다.
지금 하는 일이 가슴 뛰는 일이라고 잘라서 말할 자신이 없어서이다.
대답은 고사하고 어떤 일이 나의 가슴을 뛰게 하는지조차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대부분 먹고 사는 일에 쫓겨서 심장이 뛰도록 일은 해 보았지만 가슴이 뛰는 일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볼 겨를 없이 살아왔다.

삶은 그렇게 사는 것인 줄 알고 살아왔다.

먹고 살기에도 바쁜 사람에게 가슴 뛰는 일을 찾으라는 말은 가슴에 불을 지른다.
그들에게도 개개인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도 숨겨 놓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을 끌 수 있는 방법은 누구도 가르쳐 주지 못한다.
불은 스스로  꺼야 한다.

가슴 뛰는 일을 찾아 내서 끄거나 세상의 차디 찬 물을 끌어다 꺼야 한다.
그래서 선뜻 몸을 던지지 못한다.
뒷감당을 해 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저게 나의 길인지 모르는데...'
그렇게 시간은 지나간다.


마흔이 넘은 남자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회사에서는 열심히 일 하는게 그 한 가지다.
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가정에서의 자리다.
부여된 자리는 남편과 아버지인데 그 역할은 의문스럽다.
아내나 아이들도, 스스로도  그 자리의 존재감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일에 빠져든다.
자신의 워치를 확인할 수 있는, 무언가 성취를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게 일이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가정에서는 더 멀어진다.

젊은 시절에는 취직 공부를 하느라 청춘을 그대로 흘려 보내고,
나이가 들어서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또 시간을 그대로 흘려 보내고 있다.


누가 이 일을 왜 하느냐고 물었을 때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게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하는, 내가 살아 있구나' 하고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더 망설이지 말고 그 일을 찾아 그 일에 미쳐 보자.
'그래 나 미친 남자다'  이렇게 말 해 보자.



◆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땅에 내려 온 천사 미하일은 세 가지 질문의 답을 찾으려 한다.

천사 미하일이 찾은 답은  '사랑'.
천사는 답을 찾아서 만족스럽게 하늘로 올라 갔지만 그가 찾은 답이 정답인지는 모를 일이다.

모두가 자신만의 답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아니 남들에게 남겨지는 기억은 제쳐 놓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스스로 돌아 본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그날 그때까지 나는 무엇으로 살아 왔을까?

중년의 나이까지, 한 사람의 회사원으로, 한 아이의 아버지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그 외엔 나를 규정할 만한 게 또 뭐가 있을까?

나는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떠난 걸까?
나는 그 나이까지 무엇으로 살다가 떠난 것일까?


어떻게 죽어야 좋을지 배우게.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우게 되니까.

-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미치 앨봄



그렇게 어렵게 지켜 온 가치관을 후배는 학교를 졸업한 뒤 깊숙히 묻어 버렸다.

당장 취업과 생활이라는 현실이 몸을 지배했다.
삶의 지난함과 몸의 불편함보다 앞 선 있던 가치관은 간단하게 몸과 현실에 역전 당했다.

역전은 쉬웠다.

현실은 피할 수 없던 반면에 가치관은 깊이 묻어 버려도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생활은 간단하게 이념을 잠식했다.


사는 것은, 생활을 유지 한다는 것은 그렇게 모든 것에 앞선다.
그래서 몸을 던져 지킨 가치관마저 쉽게 버리도록 만들어 놓는다.
그게 현실이고 정직한 모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대신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날을 보낸다.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의 문제는 가장 힘이 세다.
모든 것을 부러 뜨리고 왜곡 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에 매달려 있는 시간 동안 일어났던 삶의 왜곡은 버려야 할 짐과 끌어 안아야 할 짐의 왜곡이다.
버려야 할 것은 끌어안고, 끌어 안아야 할 것은 버리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삶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믿고 앞으로도 그렇게 믿고 살아 갈 것이다.

그런 왜곡이 그나마 지금 까지의 삶을 유지시켜 준 것일까?
반대로 살았다면 더 궁핍하고 불행하고 실패한 삶을 살았을까?
모를 일이다.


'지금 이 순간까지 나는 무엇으로 살아 온 것일까?'라는 질문도 이미 때가 늦었다.
그 시간은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또 다른 어느날,
다시 버스사고가 나거나 그런 순간이 왔을 때,
그때 다시 한번 '나는 무엇으로 살아 온 것까?'라는 질문이 생긴다면 그때는 답을 할 수 있게 하자는 거다.


마흔은 의문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먹고 산다는 것 이상의 삶, 그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시기가 마흔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 '어떤 노후를 살고 싶은가?' 중...

삶에 만족하지 못할수록 죽음에 대한 불안은 커진다.
자신이 언젠가 죽을 운명임을 아는 것이 매튜로 하여금 삶과 화해하게 했고 우선 순위를 다시 조정하게 했으며 자아실현에 전념하게 했다.

-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윌리엄 새들러



마흔이 넘어서면 노후에 대한 대비를 시작해야 한다.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서 자신의 노후에 대한 청사진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도 탄탄한 청사진을 말이다.

거칠게라도 청사진이 완성되면 그 다음은 도전이다.
도전조차 어렵다면 가슴속에 그러한 마음을 담아서 쌓아 놓는다.
마음이 있다면 언젠가 기회는 온다.

젊어서부터 조금씩 쌓아 가는 '노후  마일리지'는 그 순간이 눈앞에 닥쳐 왔을 때 큰 기쁨으로 삶을 채워  준다.



◆ '지도를 그려라, 미래를 그려라.' 중...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세상은 말했다.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라고 말했다.
열심히 일하고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돈을 많이 벌라고 일러줬다.
그것이 세상의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세상은 가르쳐 줬다.

가르쳤다는 말은 지식이나 이치를 깨닫게 한다는 것이고,
가리키다는 말은 어떤 방향이나 대상을 집어서 보이거나 알리는 것을 말한다.

사전적 어의를 따진다면 세상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가리켜 준 것이었다.
그쪽에 그런 길이 있다고, 그 길이 가장 좋고, 그 길이 가장 빠르고, 그 길이 가장 안전하다고 가리켜 주었다.
그러니 그 길로 가라고 했다.

세상의 가르침은, 아니 가리킴은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을 이끌어 온 지도였다.

세상이 만들어 준 지도는 네비게이션과 같다.
편하고 빠르게 갈 수 있다.
알려 준 대로 가기만 하면 된다.
가야 할 길에 대한 고민도 크게 줄여 준다.

정답이 나와 있는 마당에 굳이 다른 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을 살고 나이가 들면 네비게이션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길을 찾는 능력과 감각을 떨어뜨려 길치로 만들기도 한다.
갈수록 공간 감각이 떨어지고 나중에는 네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능력만 남게 된다.

남이 알려 준 길에 의지해서 살아 온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지도를 그리지도 못하고, 지도를 읽지도 못하게 된다.


마흔은 안개 속으로 들어 서는 나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망설임 없이 달리던 발길은 마흔이 넘어서면 흠칫 멈춰 선다.

이제 어디로 달려야 하는지 판단이 혼란스럽다.
그래서 마흔은 길을 잃는 시기다.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길을 알려주는 네비게이션은 지정된 경로를 따라 목적지에 도착하면 역할이 끝난다.
세상이 만들어 준 지도는 네비게이션과 같다.

그 네비게이션은 마흔이 넘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역할이 없다.
이제는 스스로 지도를 만들어 가야 한다.


마흔이 넘으면 세상이 가리켜 준 제법 넖고 탄탄한 길은 막 다른 길로 변한다.
그 지점에서 세상은 말이 없어진다.
이 길로 가라 또는 저 길로 가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세상이 알고 있는 길이 끝나고 있는 것이다.
어떡 길도 안내해 주지 않는 내비게이션, 세상이 손에 쥐어 준 지도를 버려야 할 시점이다.

자신이 가야할 길을 찾아가는 자신의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날마다 하나도 다르지 않은 하루 하루에 침잠해 들어가지 말고 미래를 그려야 한다.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  가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무라카미 하루키

 

◆ '한 방은 없다' 중...

인생은 한 방이라고들 한다.
다들 한 방을 말한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방이면 된다고 말한다.

월급 받아서, 저축해서, 언제 돈을 모으고, 언제 편하게 살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한 방이면 된다.

한 방의 마력은 거기서 나온다.
힘들이지 않고  간단하게 인생을 바꾼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성취 공식은 '재능 더하기 연습'이다.
문제는 심리학자들이 재능 있는 이들의 경력을 관찰하면 할수록 타고난 재능의 역할은 줄어들고 연습이 하는 역할은 커진다는 데 있다.


에릭손의 연구에서 무릎을 치게 되는 부분은 그들이 '타고난 천재',
즉 다른 사람이 시간을 쪼개 연습하고 있을 때 노력하지 않고 정상에 올라간 연주자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더불어 그들은 '미완의 대기',
다시 말해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하지만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엔 뭔가가 부족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들의 연구 결과는
어느 연주자가 최고 수준의 음악학교에 들어 갈 만큼 재능이 있다면,
실력 차이는 그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게 전부다.

덧붙이자면 최고중의 최고는 그냥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훨씬, 훨씬 더 열심히 한다.

복잡한 업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탁월성을 얻으려면,
최소한의 연습량을 확보하는 것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은 수많은 연구를 통해 거듭 확인되고 있다.

사실 연구자들은 진정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매직넘버'에 수긍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1만 시간이다.

- 《아웃라이어》말콤 글래드웰



'한 방'을 원하는 것은 삶을 바꾸고 싶어서이다.
결국 돈으로 귀착이 되기는 하지만 인생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의 분출이다.

인생을 바꾸는 가장 쉬운 방법은 돈이다.
많은 돈을 벌면 인생이 바뀐다고 생각한다.
실제 그렇기도 하다.

돈이 아니라면 자신의 일에서 또는 자신만의 분야에서 남들이 따라 오기 힘든 자리를 일구는 것이다.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일정한 위치와 사회적 입지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런 자리에 오르는 것도 인생을 바꾸는 방법 중 하나다.

흔들리지 않은 자신만의 성을 갖게 된다.
그런 자리에 오르려면 그만한 시간과 노력과 땀이라는 대가가 있어야 한다.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돈이든 자신의 입지든 한 방에 되는 것은 없다.
세상에 한 방은 없다.


남의 현재를 시샘하지 말아야 한다.
부러워하는 것은 좋지만 욕 하거나 헐뜯지는 말아야 한다.

그사람이 그만한 자리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들인 시간과 노력과 땀을 먼저 보아야지 자신의 쓰린 속을 먼저 달래려고 하면 안된다.

시샘을 하는 사람들이 먼저 떠 올리는 것이 '한 방'이다.
순식간에 그만큼 따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래서 한 방이 필요하게 된다.
보란 듯이 보여 주고 싶어서이다.

그러나 '한 방'의 결과는 대부분 쓰다.
'한 방' 기다리다가는 한 평생을 그냥 흘려 보내기 십상이다.

반면에 자신이 그동안에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도전도 하지 않고 땀도 흘리지 않았던 자신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 갔는지 생각하지 못한다.

먼저 떠 울려야 할 것은 이것이다.
나는 무엇을 했나?


'1만 시간의 법칙'은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
10년 동안 매일 3시간을 모아야 1만 시간이 된다.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면, 무언가를 내놓고 싶다면 그 정도의 노고를 들여야 한다.


나이를 먹고 시간이 갈수록 마음은 초조해 진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시간이 지나간다는 생각이 짓 누룬다.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조급해져도 '한 방'으로 순신간에 바뀌는 인생은 없다.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손 쉬운 방법에 현혹되는 게 사람이기는 하다.
그러나 '한 방'은 없다.

이리 살아도 저리 살아도 시간은 간다.
그렇게 시간을 모아서 1만 시간을 만들면 삶이 바뀌는 단초가 된다.

고통없이 피는 꽃은 없다.
한 방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