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읽은 고구려의 1권부터 5권중 가장 답답한 기분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다.
'고구려'하면 떠 오르는 이미지하고는 어울리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는 '고구려 5_고국원왕, 백성의 왕'편이다.
'미천왕' 편인 1권에서 3권, '고국원왕_사유와 무' 4권, '고국원왕_ 백성의 왕' 5권.
1권부터 4권까지는 읽어 나가면서 등장인물들의 외적 활동... 대립을 하면서 강인함과 용맹함을 공유하는 막힘이 없는 상쾌함을 가지게 한다.
반면에 5권은 답답함을 느낀면서도 생각을 깊게 하면서 읽게 만든다.
현재처럼 국경이 뚜렷하게 정해져서 자국민을 확실하게 보호할 수 있는 시대가 될 수 없던 고구려.
수시로 바뀌는 국경이라 바뀔 때 마다 수 없이 목숨을 잃게 되는 백성들.
을불은 자신의 세대에 고구려를 외부의 어떤 세력에도 침략을 받지 않는 강대한 국가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다고 믿었을까?
세자로 '무'가 아닌 '사유'를 지명한 것은 앞으로의 왕은 '백성을 위한 왕'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지금까지의 왕은 백성을 위한 왕이 아니었나?
백성을 위한 왕이란?...
무조건 백성의 안위만을 위해 부딪혀 오는 침략자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한다?
침략자가 독재자 또는 그 이상의 폭군이라면 항복한 나라의 백성들은 과연 행복할까?
《...
"국경이란..."
딱히 구획을 정해놓은 것도 아닐뿐더러, 그랬다 한들 군사가 넘어가면 금새 사라지고 마는 것이 국경이었다. 전투가 벌어질 적마다 전술상의 유불리에 따라 얻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는 땅이다 보니, 한 해에도 열 번 그 주인이 바뀌게 마련이어서 굳이 지키려고 애쓸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국경 근처에 사는 백성들의 삶이란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전란에 휘말려 재산을 잃고 생명을 잃는 자가 부지기수요, 강제로 끌려가 군사로 쓰이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양국 중 어느쪽이든 모든 국경에 군사를 주둔시킬 수 없으니 그들을 지켜줄 방법 또한 묘연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 또한 타고난 운명이겠지."
무는 고개를 흔들어 잠시간 머리를 스치던 상념을 지웠다.
...》
《...
"이 나라는 형님만의 나라가 아닙니다. 고구려인 모두의 나라입니다."
무는 그말을 마지막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몇 발짝을 옮겼을 때였다. 영원히 침묵하고 있을 것만 같던 사유의 처소에서 소리가 흘러 나왔다.
"네가 말하는 고구려인이란 누구를 가리키느냐?"
"고구려에 사는 모두를 뜻합니다."
걸음을 멈춘 무에게 사유의 물음이 이어졌다.
"접경에도 수많은 백성이 있다. 고구려 군사가 진군하면 그들은 고구려의 백성이요, 모용부 군사가 주둔하면 그들은 모용부의 백성으로 변모한다. 그들은 누구냐?"
무는 순간 움찍하였다. 누구보다 그들을 잘 아는 것이 본인 인 까닭이다. 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방 안의 사유는 말을 이었다.
"정녕 무지렁이 백성이 나라를 사랑하여 농기구를 내던지고, 장수들이 오직 국가만을 사랑하여 목숨을 바친다고 생각 하느냐? 그들이 정녕 고구려에서 태어 났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목숨보다 더 고구려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느냐는 말이다. 아니다. 그들은 국가의 힘에 강제 당하고, 나라라는 당위에 속아 전쟁터로 내몰리는 것일 뿐이다."
"......."
잠시 사유의 말을 곱씹던 무는 이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사유는 탁상에 앉아 펴낸 생각만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웠던 고구려인의 희생을, 결단을. 극기를 모두 부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의 얼굴에 조금씩 분기가 차 올랐다. 결코 사유를 대함에 있어 무례한 적이 없던 무였으나 이번 만큼은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정녕 그렇게만 생각 하십니까? 그것이 얼마나 편향된 생각인지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
"나라와 가족, 이웃을 지키고자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나선 그들의 신념과 고구려에 대한 자부심이 그럼 모두 나라가 강제해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위선이요, 거짓이란 말씀이십니까?"
"......."
다시 사유는 말이 없었고 무는 제자리서 몇 번이고 호흡을 골랐다. 한참이 지나서 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예전의 침착하고 예의 바른 목소리고, 무는 마지막 말을 던져 놓았다.
"형님의 칼이 되겠다는 맹세, 그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형님께 다른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바라건대 부디 만인이 바라는 성군이 되어 주십시오. 그것만이 이 아우가 원하는 것 입니다."
"......."
무는 그 말을 끝으로 평양성을 떠났다.
...》
을불의 죽음 후 왕이 된 사유.
사유가 세자가 되기 전 부터 고구려인의 기질과 주변 상황에 맞는 왕은 사유보다는 무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조정 사람들.
무는 스스로 신성태수로 국경 수비를 맡는다.
자신이 궁에 있으면 피어날 불씨... 반란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국경 수비를 하면서 10번이 넘는 싸움에서 패가 하나도 없는 것을 치하하기 위해 사유가 궁으로 불렀다.
《...
"오지 않았어야 했다."
의식 깊은 곳 저변을 두드리는 목소리였다. 또한 궁성으로 돌아오면서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다. 퍼뜩 눈을 뜬 무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고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어머님"
세월은 재기로 반짝이던 눈을 이제 깊숙이 갈무리하고 있었다. 당대 제일의 재사(才士)라 불리며 천하를 주물렀음에도 그 뜻을 감추고 궁중 깊숙히 몸을 감추었던 여인. 머리칼이 희끗해지고 눈매에 주름이 잡힌 태후 주아영은 흐트러진 둘째 아들의 모습을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 보았다.
"뵙고 싶었습니다."
"간밤에 궁성이 무척이나 들썩이더니 이 어미의 마음이 그에 못지않다. 다만 성숙치 못한 너의 몸가짐이 안타깝기만 하구나."
"..."
"내 너에게 향후 십 년간은 도성에 나타나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아직도 조정에 너를 반기는 이가 이다지도 많거늘! 네가 그리도 인내와 분별이 없는 아이였더냐."
짐짓 엄한 꾸짖음이었다. 무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답했다.
"날이 밝는 대로 돌아갈 것 입니다."
"앞으로는 행동에 앞서 두 번을 더 생각하여라."
"예."
"불쌍한 녀석."
...》
자신이 세자가 될 줄 알고 정효에게 왕후자리를 약속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효는 세자가 된 사유의 부인이 되어 임신한 사실을 궁으로 돌아 온 무에게 말을 한 후 돌아선다.
이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무는 술로 잊고자 한다.
어머니인 주아영를 만난 후 다시 신성으로 돌아가면서 무는 사유와 만나서...
《...
무어라 할 말이 없이 말문이 막힌 사유에게 무는 잠시 망설이다 결심을 한 듯 품속에서 목패를 꺼내 내 밀었다. 사유도, 무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이를 받은 사유에게 무는 싱긋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태자의 이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부(丘夫), 언덕 위에 선 사내. 모자람 없는 태왕이 되어 많은 사람이 따르리라는 뜻입니다."
"무야."
"형님이 옳다고 믿는 길을 가십시오. 저는 영원히 그 길을 따를 것 입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사유에게 무 또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했다. 임지로 떠나가는 그를 성문 밖까지 배웅한 사유는 그이 모습이 사라질 즈음 곁을 지키던 왕후에게 말없이 목패를 건넸다. 소매를 들어 눈가를 가리는 왕후의 등을 토닥이며, 무엇을 생각했는지 사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태후 주아영.
스스로 북전에서 자신을 숨기고 있지만 을불이 다 풀지 못한 매듭을 풀기 위해 움직인다.
바로 모용부를 없애기 위해서이다.
사유의 뜻이 제대로 펼쳐 질려면 모용황을 없애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적진에 뛰어 들면서 모용황과 그의 군사들을 성안에 잡아 두는데...
《...
마침내 평곽의 성문이 열리고, 단 한 기의 인마(人馬)가 넓은 성문을 통과하여 모용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온통 뒤집어 쓴 흙먼지에도 아랑곳 않고 아영은 이마께에 흐르는 땀을 닦고는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그대로 모용인을 내려다 보았다.
"고구려의 원군은 어떻게 된 것 입니까?"
어리둥절하여 묻는 모용인에게 아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고구려의 원군이다."
"예?"
"내가 바로 십만 군사이여. 모용황의 숨통을 끊을 칼이다."
아영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한 모용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 허황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 평생 들어 온 어떤 말보다 그를 강하게 전율시킨 까닭이었다.
...》
태후 주아영의 지략으로 다 잡은 모용황에게 사유는 머리를 숙이면서 놓아준다.
이 일로 주아영은 북전에서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
훗날 주아영은 모용황에게 볼모로 잡혀가게 되며, 무는 스스로 자신의 어미인 주아영을 다시 고구려로 데려 오기위해, 을불의 시신을 돌려 받기 위해 모용황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형님이라 부르는 치욕을 겪게 된다.
구부의 소에 대한 여러 답변들.
구부의 소...
《...
구부가 이른 곳에는 죽은 지 며칠 되었는지 파리가 잔뜩 꼬인 농부의 시테와 그 옆에 주저앉은 , 피골이 상접 하도록 야윈 소 한 마리가 있었다.소는 필사적으로 꼬리를 휘둘러 제 주인의 시체에 달려드는 파리들을 쫓고 있었고, 구부는 여는 때보다 더욱 깊이 그 모습에 빠져 들었다.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 같이 말을 몰던 부여구가 재촉 하였다.
"그만 가지."
그러나 잔뜩 얼굴에 힘을 주고 있던 구부는 이를 들을 척, 만 척하고 소와 농부의 시체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서는 별안간 소를 질렀다.
"이놈아! 저리 가거라!"
다음 순간 부여구는 입을 떡 벌렸다. 구부가 돌연 힘차게 소를 걷어 찬 까닭 이었다. 가뜩이나 다 죽어가던 소가 슬피 울며 갑자기 나타난 난봉꾼을 바라 보는데, 구부는 거듭 거세게 소를 걷어 찼다. 연이은 폭행에도 원체 구부의 몸이 작아 소가 꿈쩍도 않자 구부는 나뭇가지를 주워 찌르고 돌을 주워 던지는 등 온갖 패악을 부렸다. 결국 견디다 못한 소가 일어서서 그 자리를 피하고서야 씩씩대던 구부는 행패를 멈추고 제 갈 길로 돌아섰다. 그러나 구부가 등을 보인 순간. 소는 어느새 농부의 곁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 눔이!"
구부는 다시 소를 쫓아갔고. 소는 황소 고집이라는 말을 몸소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에게서 도망쳤다가 농부에게 돌아가기를 끈질기게 반복 하였다. 구부의 못된 장난질은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중단 되었고, 땀을 잔뜩 흘린 채 소를 노려보던 구부는 결국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회군이다, 회군."
알 수 없는 소리를 던진 구부가 이번에는 농부의 시체에 다가갔다. 그러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절을 올렸다.
"현인의 다스림이 깊어 감히 이길 도량이 없습니다. 살았으면 스승으로 모셨을 것을."
.......
문득 부여구가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꿈과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꿈과 의지란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있지. 그들이 바로 군주이다. 군주는 신하와 백성에게 제가 품은 꿈과 의지를 보여주며, 신하와 백성은 그것을 마치 제 것인 양 받아 들인다."
구부는 갑자기 터져 나오는 백제 장군의 달변에 숨을 죽였다.
"농부는 풍작을 하리란 꿈과 의지가 있었고, 아무런 이유없이 그저 살아 있기만 하던 소는 그 꿈과 의지를 농부에게서 부여 받은 것이다. 소는 농부가 그 꿈과 의지를 향해 달려가는 내내 그와 함께 했을 것이며 마침내 달성 하였을 때에 함께 즐거움을 누렸을 것이다. 풍작의 결과물은 소에게도 일정량 돌아 갔을 것이며. 그때 소는 마치 제 꿈이 이루어진 양 행복했을 것이다."
구부는 그저 귀 기울여 듣고만 있었다.
"이제 농부가 죽었으니 소는 꿈도 의지도 잃었다. 그런 까닭에 갈 곳 또한 잃고 그 자리에서 과거의 기억만을 되새기는 것이다."
부여구는 말 없는 구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신하와 백성에게 외면 당하는 고구려의 태왕을 떠 올리고 있으리라. 고구려 태왕 사유는 저를 대신하여 제 어미와 동생이 보여준, 고구려의 만인이 지지했던 꿈과 의지를 억지로 꺾었고, 그렇기에 군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홀로 남은 것이었다. 부여구는 어린 구부가 제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한 것을 느끼고는 기특한 표정을 지은 채 막사를 나섰다.
...
눈을 부릅뜬 채 구부를 노려 보면서도 이야기를 다 들어주던 모용황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물음이 끝나자 바로 대답 하였다.
"채찍이다."
"채찍이라 하셨습니까?"
"소는 주인의 채찍을 맞는 것이 두려워 주인이 시키는 대로 평생토록 일만 한다. 왼쪽으로 가야 할 때에는 왼쪽으로 갈 때까지 채찍을 맞고, 오른쪽으로 가야 할 때에는 오른쪽으로 갈 때까지 채찍을 맞는다. 일어나는 것도, 눕는 것도, 먹는 것도 모두가 채찍을 맞기에 할 수 있다. 이제 주인이 죽었으니 소에게 채찍을 때려줄 사람이 없지 않으냐. 죽은 주인의 곁을 떠나 먹을 것을 찾으라고 채찍을 때려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잊지 않으려는 듯 모용황의 말을 곱씹어 몇 번 되새기던 구부는 곧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읆조렸다.
"폐하의 말씀이 크게 옳습니다. 우매한 눈을 틔워주신 은혜 참으로 감사 합니다."
...
"네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도록 하는구나."
이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연 석호는 얼굴에 미소를 떠 올리며 답했다.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因緣)이라는 것이 있다. 많고 많은 인연중 평생을 섬기는 주인으로 만난 인연이란 단연 으뜸일 터. 그 무거운 인연을 어찌 끊고 떠나겠는가. 아마도 소는 다음 생애에 있을 인연을 위하여 제 의리를 지켰으리라. 누가 소에게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안 것이니 참으로 석가의 덕이 깊다 할 만하다."
"그 인연이란 끊어지지가 않는 것 입니까?"
"사바세계를 떠 돌고 떠 돌다 인연의 무거움을 알고서야 성불하는 것이 불법이니 종래는 누구나 인연의 중함을 알게 되는 법이다. 끊어낸 줄 알아도 끊어지지 않은 것이 인연이거늘."
스스로의 답에 만족했는지 한껏 도취된 표정으로 답한 석호는 구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보통 소년이 아니로구나. 내 평소 인연의 질기고 무거움을 강변(强辯)하는 승려는 많이 보았으나 이처럼 직접 증명하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
"답이요?"
"그래. 본래 욕심이란 나보다 나은 이를 보아야만 생기는 법. 고을 사람 모두가 형편이 같으니 차이가 없다. 그리하여 법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 정말로 세상에는 법이란 것이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세상이 아니라 이 고을뿐이다."
"이 고을만이요?"
"바깥 세상에는 이미 신분이 높은 자와 가진 것이 많은 자가 있다. 온 세상이 이 고을과 같으려면ㄴ 그들 모두가 사라져야 할 터.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법치라는 것은 처음부터 차이에서 출발하고 차이를 확고히 하는 것일 뿐 만법이 될 수 없다. 아아, 통치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구나. 도대체 무엇이 군주와 백성의 기준이 되어야 한단 말이냐. 결국 군주의 선정이란 변덕스러운 자의(恣意)에 불과한 것이냐."
.......
"정말 그것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러고는 구부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피식 웃으며 답했다.
"밭을 갈아 줄 농부가 죽었잖습니까. 소는 밭을 갈아야 먹을 것이 생기는 법인데 농부가 죽었으니 누가 함께 밭을 갈아 줍니까. 제 밭을 갈도록 씨를 뿌려 줄 농부가, 수확을 하여 여물을 먹여줄 농부가 죽었으니 어쩌겠습니까. 밭을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밭주인의 이야기를 듣던 구부는 언제부터인가 얼어버린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를 본 밭주인은 손을 들어 몇 번 그의 눈 앞을 휘휘 저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러니까 소에게는, 농부가 제 일꾼이었다는 말이냐?"
"물론입죠. 인간이야 소가 일꾼이라 생각하겠지만, 어디 소도 그리 생각 하겠습니까?"
구부는 바닥에 주저 앉았다. 돌연 오만 가지 생각이 뒤엉키며 여태껏 생각해 온 모든 것들이 한도 끝도 없는 회의와 반성으로 빠져 들었다. 그 사이로 사유의 한 마디가 귀를 울리며 들려왔다.
'제가 죽을 것을 알았으면 소를 어디에라도 보냈어야 하지 않겠느냐. 농부가 제 생각만 하였으니 소가 그리 굶는 것이 아니겠느냐.'
...》
모용황이 대군... 5만을 데리고 고구려를 치기위해 산맥을 넘을 때 아불화도와 부딪힌다.
이때의 아불화도는 사유가 보낸 전령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으로 환도성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3천기로 5만의 모용황 군사를 3일 동안 휘 젖은 후 죽음을 맞는다.
《...
"환도성으로 가서 전하라. 아불화도는 산달곡에 묻혔노라고."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흠칫 몸을 떠는 이들이 있었다. 아불화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삼천여 군사 가운데 누구 하나 눈에 익지 않은 얼굴이 없다는 듯. 그는 따르는 이 모두와 눈길을 교환했다.
"두려움이란 내일을 생각할 때에만 있는 법."
장졸들이 그의 뜻을 알고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도 입술을 꿈틀거렸다.
...》
점점 강성해진 백제는 고구려를 침략한다.
침략 이유는 백제에서 도망간 사람을 다시 백제로 돌려 보내라.
사유의 덕택일까?
군사들의 느슨해진 정신, 준비가 제대로 안된 무기와 갑옷, 인물의 부재속에 백제의 왕인 부여구는...
《...
항복을 청해 오는 적장이라 여기며 구부 가까이 다가오던 부여구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 하고는 탄식을 터트렸다. 해를 쫓는다며 백제군 진영에 찾아왔던 어린 학자, 장난 같은 약속을 지켜 송해를 죽인 소년. 비록 중년이 되었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 너무도 선명하게 간직되어 있던 그 소년의 얼굴이 세월을 머금은 채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네가 고구려의 태자였는가?"
"부여구. 너는 나에게 빚이 있다."
이어진 구부의 말에 부여구는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자신이 백제왕인 줄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소년이 지금 이 순간 태자의 신분으로 자신을 마주해 내 놓을 말이 무엇일지는 너무나 뻔한 것이었다. 이제 싸움을 끝내고 회군해 달라는 목숨을 건 약조와, 지금 그의 말을 들어주면 두고두고 큰 후환이 될지 모른다는 예감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는 부여구에게 태자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전혀 뜻밖이었다.
"사기와 그의 일가족을 돌려달라"
"뭐라?"
부여구는 저도 모르게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면 고구려는 향후 오 년간은 백제와 선린을 유지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시에는"
구부는 타는 눈으로 부여구를 노려 보았다. 이어 터무니 없을 만큼 자신에 찬 소리가 그의 입에서 또박또박 흘러 나왔다.
"오늘 이 자리에서 두 나라중 하나가 멸망할 것이다."
그 말을 남겨두고 구부는 먼저 말머리를 돌렸다. 부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협박과도 같은 말을 남겨놓고 돌아가는 그의 뒷 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던 부여구는 이어 수만 쌍의 눈길과 마주쳐야 했다. 바로 고구려의 군사들의 눈길이었다. 그 눈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휘두르지 않고서는 울분에 미쳐버릴 것만 같다고, 둘 모두 사느니 둘 모두 죽는 것이 낫다고 외치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그 눈길을 받아내던 부여구는 이내 씁쓸한 얼굴로 말머리를 돌렸다.
"사기와 그의 일가족을 보내 주거라."
"폐하!"
"이길 수도 없는 군사, 이겨서 얻을 것도 없는 군사다. 고사유가 평생 처음 꺼내 든 칼이 참으로 날카롭기만 하구나."
그러고는 정말로 전군에 명을 내려 회군을 시작 하였다.
...》
을불의 선택, 사유.
고구려가 아닌 사유의 나라가 되어 버렸다.
수많은 인재들이 덧 없이 죽음을 맞이 했으며, 갖은 치욕를 겪었으면서 버텨 온 고구려.
사유는 백성을 위한 왕이 되었을까?
사유는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는 왕이었을까?
어쩌면 미래의 고구려 백성들은 더욱 힘들어 지지 않을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사유라면...
국민들의 삶이 편해질 수 있게, 정치에 신경을 덜 쓸 수 있게 정치인과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내려 놓을 수 있을까 ?
고구려 6권, 7권, 8권...
계속해서 책으로 나와 작가의 말처럼 중국의 삼국지와 같은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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