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길 모퉁이 카페를 향하여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놓기 전에 마치 귀머거리 벙어리처럼 거기 길가에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카페는 전에 한 번도 눈여겨 본 적은 없지만 자기 기억 속에 영원히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 길 모퉁이의 카페 _ 프랑수아즈 사강(Francoise Sagan) 』
프랑수아즈 사강의 눈에 비친 파리의 카페는 그런 곳이었다. 눈여겨 본 적은 없으나 기억 속에 영원히 새겨진, 일상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지금 다시 파리를 찾는다면 나는 가장 중요한 일정인 양, 어슬렁거리며 유명 카페를 찾아 다니고 싶다. 그저 그 카페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축제가 시작되고, 그 축제에 동참하는 것과도 같다니 참 저렴한 축제 참가비가 아닌가.
《카폐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축제는 시작된다.》中...
글을 쓸 때면 언제나 내 곁에는 커피 한 잔이 놓여 있다. 나뿐만 아니라 아마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럴 것이다. 진한 에스프레소든, 향기로은 아메리카노든, 우유를 넣은 라테든... 녹슨 정신에 커피 향이 스며들면 삐거덕 거리며 움직이지 않던 생각과 감정이 비로소 손가락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물론 모든 미식 문화 중에서도 커피는 파리의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는 원천, 음악과 미슬과 문학의 검은 뮤즈였다. 커피를 마시면 글이 저절로 써지는 듯했다는 발자크의 문장이 가슴에 남는다.
커피가 위 속으로 떨어지면 모든 것이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생각은 전쟁터를 기병대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기억은 기습하듯 살아난다.
작중 인물은 즉시 떠 오르고 원고지는 잉크로 덮인다.
시나리오를 쓰는 길고 어두운 밤이면 내게도 커피가 필요하다. 작중 인물이 떠 오르고 흰 여백이 검게 채워지길 기원하며 의식을 치르듯 향긋한 커피 한 잔을 내린다.
《모두가 잠든 밤, 당신의 영감을 깨우는 검은 뮤즈.》中...
물론 전부를 건 게임에서의 승자는 인생의 승리자로 주목을 받는다. 그들에겐 그 분야의 장인이라는 명예가 남는다. 그렇다고 내 세울만한 성과를 얻지 못한 사람을 패배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한 번이라도 전부를 걸고 무엇인가를 해 본 사람은, 그 지독하고 지극한 판에서 끝까지 가 본 사람은 안다. 문제는 승패가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하여 전부를 건 게임에서 실패하고 숨은 실력자가 되는 이들을 보았다.
사실, 전부를 걸어 평범함의 경지를 뛰어 넘어 버린 사람은 그것조차 상관하지 않는다. 즐김의 끝, 그곳까지 가 보았으니까. 지나온 나날에 트로피를 수여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니까.
나는 영화 '가비'에 커피를 아끼는 장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담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시대 배경이 워낙 복잡하고 방대해서 그 틈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따냐에게 처음 커피를 가르쳐 준 남자 일리치의 대사 속에 겨우 몇 마디를 담아 낼 수 있었다.
"커피는 내리는 것은 마음을 내리는 것이다."
이 대사 한 줄이 내겐 참 각별하다. 음악, 춤, 소리, 농사, 악기, 그림, 영화... 제각각 세계는 다르지만 장인들이 그 세계에 담아 내고자 하는 결정체는 모두 같다. 그건 아마도 '마음', 그들 스스로가 경험한 순도 높은 열정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장인은 이따금 나를 부끄럽게 한다. 나는 한 번도 그들처럼 열정적으로 살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장인들은 지금의 내 열정이 얼마만큼의 크기인지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들은 겨우 한 번 건드려서 그 끝을 간보려 하거나 결과물이 어떤 것일지 미리 계산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처음 품은 순정을 끝까지 잃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에서 끝의 끝까지 가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그런 순정이 부럽다.
《정성을 다해 순도 높은 열정을 담아낸다.》中...
한 웹진에 시인 심보선은 이런 글을 썼다.
"우리는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약해진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과 밀고 당기기를 하느라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의 전쟁 같은 삶을 버텨왔던 힘이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블루마운틴을 마실 때 나는 그런 사랑에 빠진다. 그저 한없이 약한 자세로, 모든 찬사조차 생략한 채 평안한 맛의 균형을 즐길 뿐이다.
모든 아름다움에는 이유가 있는 법,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 세계에 대해 깊이 배우고 알아 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움직일 테고, 당신은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사랑해서 알아 간다기보다 알게 되어서 사랑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 사랑은 눈 내리는 감은사지 삼층석탑의 풍경처럼 혹은 블루마운틴의 고요한 맛처럼 치열한 삶 속의 고요한 휴식으로 당신을 이끌 것이다.
《깊이 알수록 더 사랑하게 되는 것들.》中...
나는 도락의 절정이 그런 모습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탐닉에 빠져 허우적대기보다는 아예 끝까지 가 버리지 않는 것, 아슬아슬한 경계선 안 쪽에 멈춰 서서 그 끝을 아련히 그리는 경지가 더 윗길이라 여긴다. 무리하면 닿을 수 없는 것은 아니나, 손을 거두어 마음을 바로 잡는 것이 바로 즐김의 최고 경지가 아닐까.
빠지기 쉬운 유혹 직전의 경계선을 지키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무엇이든 그 이상 나아가면 탐닉이 되고 중독이 되어 버리니까. 차로 시작했다가 찻잔 호사로 잘못 옮겨 앉는 순간, 그래서 명품 찻잔을 종류별로 여러 벌 갖춰놓고 싶은 바람에 이르면, 주객이 전도되어 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슬아슬한 경계선 안 쪽에서 그 끝을 아련히 그려보다.》中...
더치커피는 차갑고 깨끗한 물로만 내리는 커피다. 그래서 커피의 필수적인 요소, 카페인이 들어 있지 않다. 원두의 카페인은 뜨거운 물에만 우러나기 때문이다. 더치커피엔 다만 커피 맛만이 우러난다. 뜨거운 물로 내린 커피는 상온에 두면 그 향과 맛을 잊어버리지만, 찬물로 내린 더치커피는 상온에서도 그 향과 맛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다.
똑 똑,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더치커피는 인내와 끈기를 요한다. 더치커피 한 잔 마시기 위해 쏟는 노력은, 그래서 가히 열정적이라 할 만하다. 이름을 붙인다면 그건 차가운 열정. 훅 타 올라왔다 꺼져 버리는 열정이 아니라 오래도록 가는 꾸준한 열정이다.
그래서 더치커피엔 카페인이 없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가슴을 뛰게하는 카페인, 뜨겁게 타 오르는 열정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대신 더치커피엔 진득하게 오래 기다리는 사람의 끈기가 담겨 있고, 변하지 않고 오래 보존할 수 있는 맛이 담겨 있다.
세상엔 뜨거운 열정보다 차가운 열정이 더 필요한 일이 많다. 결승점에 도달할 때까지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라든가, 며칠만 연습을 하지 않아도 실력이 녹슬어 버리는 악기 연주가 그렇다. 순간의 흥미보다는 오랜 끈기가 필요한 일들이다. 심지어 밥을 지을 때도 뜸을 들여야 맛있고, 뼈를 고아낼 때도 오랜 시간 끓여야 진국을 맛볼 수 있지 않던가.
주위를 둘러보면 진득하게 오래 그 자리에 있는 사람보다 쉽게 변해버리는 사람들이 더 많다. 일이든 사랑이든 어려우면 포기하고 지겨우면 그만둔다. 하지만 몇 번쯤, 한 방울 한 방울 끈기 있게 더치커피를 우려내듯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본다. 나 역시 그와 같은 사람이, 차가운 더치커피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오래도록 한 자리를 지키는 차가운 열정.》中...
그런데 조지 오웰을 생각해 보면 그런 설명이 그다지 설득력 없게 느껴진다. 좌의 위선과 허무맹랑한 이상과 순결주의에 독설로, 그야말로 문학적인 완성도까지 보이면서 잘근잘근 씹어 댄 대표적인 이가 바로 조지 오웰이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를 읽으면 어디 가서 내가 좌라고 말하기조차 무안하고 부끄러워진다. 그런데 그렇게 좌를 씹은 그는 끝내 좌에 머물면서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걱정했다. 그를 보면 정치 성향도 한 방에 훅 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지금, 어느 자리에 서 있느냐는 바로 그의 본래 성향이었다는 것. 그러니 좌에 혹은 우에 실망 했다고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건 별 소용이 없다.
가비의 여 주인공 따냐는 두 가지 전혀 다른 모습을 내 보여야 했다. 말도 능숙하게 타야 했지만 커피를 내리는 자세 또한 고요하고 우아해야 했다. 그야말로 열정과 냉정 사이를 능숙하게 오가야 했다. 대충 포즈만 잡아서는 조금이라도 그 세계를 아는 사람들의 눈에 거슬릴 게 뻔했다. 영화 '아저씨'에 대한 인터넷 리뷰 중 의사와 무술인이 쓴 글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킬러가 가장 경제적으로 급소만을 날렵하게 공격하더라고, 인체에 대한 공부 하나는 제대로 했더라고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나도 그 분야의 전문가 눈에 어긋나지 않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싸. 그건 지켜 나가야 할 선이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기본 자세이기도 했다.
늘, 언제나, 기본이 문제다.
생각해 보면 우리 스스로를 가장 괴롭히고 불편하게 만드는 건 대체로 쓸모없는 자의식이다.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이런 축축한 자의식의 늪에 잘못 빠져들면 사람, 참 쉽게 누추해진다. 자의식 자체가 거품이니, 거기에 휘둘리다 보면 정말 한 방에 훅 갈 수도 있다.
뒤돌아보면 낱낱인 일상이 모여 만든 삶의 한 대목은 참 신기하다. 영화 '가비' 제작 기간 동안만 해도 그렇다. 뭔가를 잃어 크게 흔들리고 상심한 그 지점이 때론 기회나 행운의 시작점이 되고는 했다. 살면 살아 볼수록 인생, 참 알 수 없다. 지치고 힘들더라도 꾸준히 가다 보면 또 한 번, 그 알 수 없는 인생의 굴곡을 넘어 행운이 찾아 오리라 믿는다. 꿋꿋이 기본을 지켜내는 사람이 한 방에 훅 가는 일은 없으니 말이다.
《한 방에 훅 가지 않으려면.》中...
탐닉(耽溺)...
빠져서 온통 마음이 쏠리다.
들여다보다...
가까이에서 자세하게 살피다.
삶 속에서 어떤 사람과 또는 어떤 일에, 어떤 환경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탐닉)
대부분...
순간의 열정보다는 기다림과 끈기가 있는 열정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다.
더치커피를 내리는 모습처럼,
맛과 향이 오래도록 유지되어 남아 있는 더치커피처럼,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다.
_ 20141012
길 모퉁이 카페를 향하여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놓기 전에 마치 귀머거리 벙어리처럼 거기 길가에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카페는 전에 한 번도 눈여겨 본 적은 없지만 자기 기억 속에 영원히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 길 모퉁이의 카페 _ 프랑수아즈 사강(Francoise Sagan) 』
프랑수아즈 사강의 눈에 비친 파리의 카페는 그런 곳이었다. 눈여겨 본 적은 없으나 기억 속에 영원히 새겨진, 일상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지금 다시 파리를 찾는다면 나는 가장 중요한 일정인 양, 어슬렁거리며 유명 카페를 찾아 다니고 싶다. 그저 그 카페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축제가 시작되고, 그 축제에 동참하는 것과도 같다니 참 저렴한 축제 참가비가 아닌가.
《카폐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축제는 시작된다.》中...
글을 쓸 때면 언제나 내 곁에는 커피 한 잔이 놓여 있다. 나뿐만 아니라 아마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럴 것이다. 진한 에스프레소든, 향기로은 아메리카노든, 우유를 넣은 라테든... 녹슨 정신에 커피 향이 스며들면 삐거덕 거리며 움직이지 않던 생각과 감정이 비로소 손가락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물론 모든 미식 문화 중에서도 커피는 파리의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는 원천, 음악과 미슬과 문학의 검은 뮤즈였다. 커피를 마시면 글이 저절로 써지는 듯했다는 발자크의 문장이 가슴에 남는다.
커피가 위 속으로 떨어지면 모든 것이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생각은 전쟁터를 기병대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기억은 기습하듯 살아난다.
작중 인물은 즉시 떠 오르고 원고지는 잉크로 덮인다.
시나리오를 쓰는 길고 어두운 밤이면 내게도 커피가 필요하다. 작중 인물이 떠 오르고 흰 여백이 검게 채워지길 기원하며 의식을 치르듯 향긋한 커피 한 잔을 내린다.
《모두가 잠든 밤, 당신의 영감을 깨우는 검은 뮤즈.》中...
물론 전부를 건 게임에서의 승자는 인생의 승리자로 주목을 받는다. 그들에겐 그 분야의 장인이라는 명예가 남는다. 그렇다고 내 세울만한 성과를 얻지 못한 사람을 패배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한 번이라도 전부를 걸고 무엇인가를 해 본 사람은, 그 지독하고 지극한 판에서 끝까지 가 본 사람은 안다. 문제는 승패가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하여 전부를 건 게임에서 실패하고 숨은 실력자가 되는 이들을 보았다.
사실, 전부를 걸어 평범함의 경지를 뛰어 넘어 버린 사람은 그것조차 상관하지 않는다. 즐김의 끝, 그곳까지 가 보았으니까. 지나온 나날에 트로피를 수여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니까.
나는 영화 '가비'에 커피를 아끼는 장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담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시대 배경이 워낙 복잡하고 방대해서 그 틈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따냐에게 처음 커피를 가르쳐 준 남자 일리치의 대사 속에 겨우 몇 마디를 담아 낼 수 있었다.
"커피는 내리는 것은 마음을 내리는 것이다."
이 대사 한 줄이 내겐 참 각별하다. 음악, 춤, 소리, 농사, 악기, 그림, 영화... 제각각 세계는 다르지만 장인들이 그 세계에 담아 내고자 하는 결정체는 모두 같다. 그건 아마도 '마음', 그들 스스로가 경험한 순도 높은 열정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장인은 이따금 나를 부끄럽게 한다. 나는 한 번도 그들처럼 열정적으로 살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장인들은 지금의 내 열정이 얼마만큼의 크기인지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들은 겨우 한 번 건드려서 그 끝을 간보려 하거나 결과물이 어떤 것일지 미리 계산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처음 품은 순정을 끝까지 잃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에서 끝의 끝까지 가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그런 순정이 부럽다.
《정성을 다해 순도 높은 열정을 담아낸다.》中...
한 웹진에 시인 심보선은 이런 글을 썼다.
"우리는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약해진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과 밀고 당기기를 하느라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의 전쟁 같은 삶을 버텨왔던 힘이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블루마운틴을 마실 때 나는 그런 사랑에 빠진다. 그저 한없이 약한 자세로, 모든 찬사조차 생략한 채 평안한 맛의 균형을 즐길 뿐이다.
모든 아름다움에는 이유가 있는 법,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 세계에 대해 깊이 배우고 알아 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움직일 테고, 당신은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사랑해서 알아 간다기보다 알게 되어서 사랑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 사랑은 눈 내리는 감은사지 삼층석탑의 풍경처럼 혹은 블루마운틴의 고요한 맛처럼 치열한 삶 속의 고요한 휴식으로 당신을 이끌 것이다.
《깊이 알수록 더 사랑하게 되는 것들.》中...
나는 도락의 절정이 그런 모습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탐닉에 빠져 허우적대기보다는 아예 끝까지 가 버리지 않는 것, 아슬아슬한 경계선 안 쪽에 멈춰 서서 그 끝을 아련히 그리는 경지가 더 윗길이라 여긴다. 무리하면 닿을 수 없는 것은 아니나, 손을 거두어 마음을 바로 잡는 것이 바로 즐김의 최고 경지가 아닐까.
빠지기 쉬운 유혹 직전의 경계선을 지키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무엇이든 그 이상 나아가면 탐닉이 되고 중독이 되어 버리니까. 차로 시작했다가 찻잔 호사로 잘못 옮겨 앉는 순간, 그래서 명품 찻잔을 종류별로 여러 벌 갖춰놓고 싶은 바람에 이르면, 주객이 전도되어 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슬아슬한 경계선 안 쪽에서 그 끝을 아련히 그려보다.》中...
더치커피는 차갑고 깨끗한 물로만 내리는 커피다. 그래서 커피의 필수적인 요소, 카페인이 들어 있지 않다. 원두의 카페인은 뜨거운 물에만 우러나기 때문이다. 더치커피엔 다만 커피 맛만이 우러난다. 뜨거운 물로 내린 커피는 상온에 두면 그 향과 맛을 잊어버리지만, 찬물로 내린 더치커피는 상온에서도 그 향과 맛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다.
똑 똑,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더치커피는 인내와 끈기를 요한다. 더치커피 한 잔 마시기 위해 쏟는 노력은, 그래서 가히 열정적이라 할 만하다. 이름을 붙인다면 그건 차가운 열정. 훅 타 올라왔다 꺼져 버리는 열정이 아니라 오래도록 가는 꾸준한 열정이다.
그래서 더치커피엔 카페인이 없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가슴을 뛰게하는 카페인, 뜨겁게 타 오르는 열정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대신 더치커피엔 진득하게 오래 기다리는 사람의 끈기가 담겨 있고, 변하지 않고 오래 보존할 수 있는 맛이 담겨 있다.
세상엔 뜨거운 열정보다 차가운 열정이 더 필요한 일이 많다. 결승점에 도달할 때까지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라든가, 며칠만 연습을 하지 않아도 실력이 녹슬어 버리는 악기 연주가 그렇다. 순간의 흥미보다는 오랜 끈기가 필요한 일들이다. 심지어 밥을 지을 때도 뜸을 들여야 맛있고, 뼈를 고아낼 때도 오랜 시간 끓여야 진국을 맛볼 수 있지 않던가.
주위를 둘러보면 진득하게 오래 그 자리에 있는 사람보다 쉽게 변해버리는 사람들이 더 많다. 일이든 사랑이든 어려우면 포기하고 지겨우면 그만둔다. 하지만 몇 번쯤, 한 방울 한 방울 끈기 있게 더치커피를 우려내듯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본다. 나 역시 그와 같은 사람이, 차가운 더치커피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오래도록 한 자리를 지키는 차가운 열정.》中...
그런데 조지 오웰을 생각해 보면 그런 설명이 그다지 설득력 없게 느껴진다. 좌의 위선과 허무맹랑한 이상과 순결주의에 독설로, 그야말로 문학적인 완성도까지 보이면서 잘근잘근 씹어 댄 대표적인 이가 바로 조지 오웰이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를 읽으면 어디 가서 내가 좌라고 말하기조차 무안하고 부끄러워진다. 그런데 그렇게 좌를 씹은 그는 끝내 좌에 머물면서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걱정했다. 그를 보면 정치 성향도 한 방에 훅 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지금, 어느 자리에 서 있느냐는 바로 그의 본래 성향이었다는 것. 그러니 좌에 혹은 우에 실망 했다고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건 별 소용이 없다.
가비의 여 주인공 따냐는 두 가지 전혀 다른 모습을 내 보여야 했다. 말도 능숙하게 타야 했지만 커피를 내리는 자세 또한 고요하고 우아해야 했다. 그야말로 열정과 냉정 사이를 능숙하게 오가야 했다. 대충 포즈만 잡아서는 조금이라도 그 세계를 아는 사람들의 눈에 거슬릴 게 뻔했다. 영화 '아저씨'에 대한 인터넷 리뷰 중 의사와 무술인이 쓴 글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킬러가 가장 경제적으로 급소만을 날렵하게 공격하더라고, 인체에 대한 공부 하나는 제대로 했더라고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나도 그 분야의 전문가 눈에 어긋나지 않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싸. 그건 지켜 나가야 할 선이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기본 자세이기도 했다.
늘, 언제나, 기본이 문제다.
생각해 보면 우리 스스로를 가장 괴롭히고 불편하게 만드는 건 대체로 쓸모없는 자의식이다.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이런 축축한 자의식의 늪에 잘못 빠져들면 사람, 참 쉽게 누추해진다. 자의식 자체가 거품이니, 거기에 휘둘리다 보면 정말 한 방에 훅 갈 수도 있다.
뒤돌아보면 낱낱인 일상이 모여 만든 삶의 한 대목은 참 신기하다. 영화 '가비' 제작 기간 동안만 해도 그렇다. 뭔가를 잃어 크게 흔들리고 상심한 그 지점이 때론 기회나 행운의 시작점이 되고는 했다. 살면 살아 볼수록 인생, 참 알 수 없다. 지치고 힘들더라도 꾸준히 가다 보면 또 한 번, 그 알 수 없는 인생의 굴곡을 넘어 행운이 찾아 오리라 믿는다. 꿋꿋이 기본을 지켜내는 사람이 한 방에 훅 가는 일은 없으니 말이다.
《한 방에 훅 가지 않으려면.》中...
탐닉(耽溺)...
빠져서 온통 마음이 쏠리다.
들여다보다...
가까이에서 자세하게 살피다.
삶 속에서 어떤 사람과 또는 어떤 일에, 어떤 환경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탐닉)
대부분...
순간의 열정보다는 기다림과 끈기가 있는 열정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다.
더치커피를 내리는 모습처럼,
맛과 향이 오래도록 유지되어 남아 있는 더치커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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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201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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