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길 모르는 사람에게 약도를 그려주어야만 하던 때가 있었다. 내비게이션이나 스마트폰처럼 세련되고 간편한 기계가 없어서, 주소만 알아도 목적지까지 바로 갈 수 있는 지금과는 많이 다르던 때였다. 그때 젊은 청춘들은 굽이굽이 거칠게 돌아가는, 구식 약도 같은 사랑을 했다.
《길 위를 떠 도는 그때 그 시절의 사랑. 》中...
한 모금 들이켜는 순간 씁쓸하게, 그러나 감미롭게 혀를 감싸는 커피. 그 섬세한 입자는 상피 세포 사이로 번져 나가며 내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깨우고, 방 안 가득 진향을 남긴다. 그래서 커피는 사랑을 닮았다. 감미롭고 씁쓸하며, 온 몸의 감각을 날 서게 하고, 사방에 흔적을 남기는 사랑의 모습 말이다. 커피나 사랑이나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려운 건 매 한가지다.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푹 빠져, 중독되어 버린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사랑은 명사지만 누군가에게 고백하거나 전달할 때는 '사랑하다'라는 동사로 쓰인다. "사랑해." 그래서 그건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 당신에게 움직여 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사랑한다'는 건 사랑 받을 때 쓰는 말이 아니다. 사랑을 주고자 할 때, 내 마음을 내 보일 때 하는 말이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주는 것이다. 그게 마음이든, 위로든, 음식이든, 체온이든...
내가 갖고 있던 무언가를 나누어 줄 때 사랑은 피어난다.
하지만 언젠가 여유로운 날, 내가 좋아하는 당신들에게 커피 한 잔 내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식사가 끝난 후 나른한 볕이 창으로 비스듬히 비쳐 들어오는 오후 쯤이면 좋겠다. 직접 로스팅한 원두를 핸드 밀로 정성스레 갈아, 김 서린 포트의 물을 졸졸 따라 커피를 내릴 것이다. 그 안에 말하지 않은 내 마음 다 녹여낼 수 있다면 좋겠다.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지친 당신에게 이 커피가 힘이 되길 바란다고...
눈치 채지 못한 사이 푹 뺘져드는 커피처럼, 당신의 사랑 역시 그런 맛과 향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고마워서 감미롭고, 미안해서 씁쓸한 언제나 위로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내가 갖고 있던 무언가를 나누어 주는 것. 》中...
"그렇게 비교하는 거 진짜 싫어요. 내가 너무 못난 것 같고, 앞으로도 못난 인생을 살 것 같아요. 나도 다 생각이 있는데. 비교하기보다는 내가 뭘 하는지 지켜보면 좋겠는데..."
그때 나는 그 아이에게 특별한 조언을 해 주지 못했다. 다만 어른들도 마찬가지라고, 나도 비교 당하는 거 싫다고 격한 공감을 표하긴 했다. 누구나 비교 당하는 건 싫어 한다고, 비교하기 보단 오래 비켜봐 주길 원한다고 말이다.
식어가는 커피처럼, 세상엔 오래 겪어볼수록 다양한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다. 나이 들어가는 길거리에서 느껴지는 향수, 함께 늙어가는 애완견이 주는 정, 빈티지 가구나 찻잔의 아름다움, 매번 들을수록 달라지는 음악의 매력, 젊을 땐 무심코 지나쳤던 고전 소설의 한 구절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깨달음...
화려한 시절은 지났지만 오래될수록 그 깊은 매력이 배어나오는 것들이 좋다.
누구나 비교 당하기 보다는 오래 지켜보아 주길 바란다. 그건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어쩌면 삶의 비밀 중 하나일지 모른다. 존재의 본질은 비교에 있지 않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비교하고 우위를 정하는 대신 오래 지켜보면 그 댜양한 매력을 느낄 수 있으니까. 식어가는 커피 한 잔이 선사하는 다양한 맛을 느껴 본 사람이이라면 알 것이다.
《모든 아름다움에 이유가 있다. 》中...
홀로 즐기는 휴식은 평화롭다. 남의 눈 신경 쓸 일 없이 편히 앉아, 부드러운 음악과 향긋한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시간.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책을 읽고, 몇 시간이고 멍하니 몽상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눈을 돌려 나 홀로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러면 아주 조금, 외롭기도 하다. 이 달콤한 휴식을 같이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런 고요한 휴식을 함께 나눌 상대는 많지 않다. 세상에는 편안한 사람보다 낯선 사람이 훨씬 더 많으니까.
하지만 익숙하고 편한 사람과는 침묵 속에서도 어색하지 않다. 침묵이 신경 쓰이지 않아서, 때로는 둘 다 한 동안 말없이 있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나는 그렇게 고요한 침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관계, 휴식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관계가 좋다. 그건 낯섦과 불편함이 없는 관계, 그래서 평화로운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관계인 것이다.
언젠가 한 번역서를 읽다가 '천사가 지나간다'라는 표현을 알게 되었다. 여럿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거기 모인 사람 모두가 입을 다물어 잠깐 정적이 흐르는 순간을 일컫는 말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 말 저 말이 마구 겹친다. 어떤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어서 끊긴 말꼬리들이 어지럽게 날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엔 갑자기 고요해지기도 한다. 그 순간에 천사가 지나간 거라니, 그래서 움찔 입을 다문 것이라니 상상만으로 즐거웟 그 표현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홀로 즐기는 휴식은 평화롭지만 때론 외롭다. 그러나 둘이 즐기는 휴식엔 혼자만의 휴식에서 맛볼 수 없는 견고한 안전감이 느껴진다. 침묵 속에서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라면 무얼 하든 편안하니까. 그렇게 마음이 통하는 두 사람이 함께 조용히 커피를 마실 때, 그곳엔 천사가 지나간다.
《천사가 지나가는 순간, 멈추다. 》中.
옛날엔 알지 못하던 일상의 기쁨을 나이 들어 새로이 발견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침에 일어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본다든가, 고슬고슬 잘 지어진 밥을 먹을 때라든가, 주차를 한 방에 성공 했다든가, 행복해 날 뛸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미소가 지어지는 이런 날들, 참 좋다. 사소한 기쁨이다.
스누피란 놈은
찰리 브라운이 점 찍어 둔 예쁜 소녀를
늘 자신이 차지한다.
차지 한다고 해야 고작 그 애의 집에서 쿠기를 나눠 먹는 것뿐이지만
그게 스누피에게 중요한 거다.
찰리 브라운은 한이 맺혀서 나간다.
난 개를 진짜 사랑해 넌 쿠기나 얻어 먹으려고 찾아간 것 뿐이잖아
진짜 사랑을 원하는 사람에게 진짜 사랑을 주는 건
쿠키를 나눠 먹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그래서 소녀들은 쿠키를 먹으러 오는 스누피가 부담없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진짜 사랑 보다는
쿠키를 나누며 싹트는 사랑이 더 깊어질 수 있다.
스누피는 그걸 아는 놈이다.
그래서 개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
개집 지붕 꼭대기에 누워서 빈둥거리는 거다.
『스누피란 놈 _ 성미정 』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귀엽고 웃겨서 킥킥거리게 된다. 진짜 사랑을 주는 것보다는 다정히 쿠키를 나눠 먹는 게 더 쉽다는 걸 아는 스누피란 놈. 녀석은 사소한 일들이 기쁨을 준다는 걸 잘 안다.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시로 풀어낸 시인 역시 작은 것이 주는 기쁨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상수동 카페들은 쿠키를 나누며 사소한 기쁨을 즐기는 스누피란 놈을 닮았다. 아니 어쩌면 그건 사소한 기쁨이 아니라, 사소해서 기쁜 걸지도 모르겠다.
《수수한 매력이 전하는 사소한 기쁨. 》中...
좋은 사람들을 만나 알아가는 건 설레는 일이다. 그건 홍차의 맛을 알아갈 때의 설렘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는 홍차를 선물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조용하고 다정한 미소를 가진 사람에게는 실론을, 솔직 담백한 매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얼 그레이를, 강렬하고 뚜렷한 인상을 주는 사람에게는 아쌈을, 만날수록 깊은 마음을 헤아리게 되는 사람에게는 다즐링을 선물한다.
그렇게 나는 그곳에서 홍차를 알게 되었다. 홍차도 커피처럼 어디에서 자랐고 어떤 손길을 거쳤느냐에 따라 다양한 맛을 담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홍차의 세계로 통하는 신비한 주문은 2,4,3 이라는 것도 알게됐다. 2그램의 차에, 400(cc)의 물, 3분의 기다림. 이것이 가장 향기로운 차를 만날 수 있는 암호였다.
처음 만났을 때 선생님은 덜 우려진 차처럼 조용히 미소만 짓는 분이었다. 하지만 차를 배우는 동안, 정확한 시간에 가장 섬세하게 우려진 차를 닮은 분이라는 느낌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좋은 사람 만나 알아가는 데서 느끼는 기분 좋은 설렘은 다양한 색과 향을 내는 홍차를 맛보는 느낌과 닮아 있었다.
이제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흘러 내렸다. 비로소 찻잔을 들어 오후의 홍차를 마실 시간이다. 이렇게 마시는 오후의 홍차는, 조용하고도 지극한 사치다.
《마음이 정갈해지는 조용한 오후의 사치. 》中...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그 상대를 오래도록 관심 갖고 지켜보게 된다. 찻 숟가락을 올리는 몸짓 하나, 웃을 때 올라가는 입가의 모양, 말꼬리를 길게 빼는 말투...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듯 열심히 그를 들여다 본다. 그러다 보면 그이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듯, 사소한 습관과 취향까지 모두 기억하게 된다. 그런 기억은 몇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랑은 어쩌면 한 사람을 기억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커피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장인이나 덕후들은 커피를 꼭 이렇게 마셔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세운 제일 강한 주장이라야, 이러이러한 편이 내겐 좀 더 맛나더라, 그쯤이었다. 그들은 커피의 이름이며 특징을 떠나 네가 가장 맛있는 방식으로 마시라고 말하곤 했다. 내 입맛대로 남의 취향을 조절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 바로 사람을 대하는 기본 자세임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남과 다른 내 취향을 인정해 주는 것을 넘어, 그것을 세세히 기억해 주기까지 할 때 우리는 감동하게 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일부러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그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담아 마음 깊이 새기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세세한 취향도 인정하고 기억해 준다. 그것이 바로 관심과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과 다른, 나와 다른 그의 고요한 의미를 다 헤아려줄 때, 그 관계엔 꽃이 피어나게 마련이다.
나는 이따금 별 이유없이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본다. 그러면 그가 나를 돌아보는 동시에 그 이름에 담긴 특별한 의미, 그 이름의 주인이 품고 있는 사소한 습관과 취향까지도 함께 피어나 나를 돌아본다. 간지럽게 왜 계속 부르냐며 활짝 웃는 그들의 얼굴까지도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마주 웃어 보인다. 꽃이, 피어난다.
《사랑은 어쩌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일. 》中...
바라보다 : 바로 향하여 보다.
사랑은...
내가 가진 무언가를 나눠 준다는 것.
오래도록 지켜 보는 것.
남과 다른 취향을 인정해 주는 것을 넘어 기억해 주는 것.
중독되어 가는 것.
함께 있어도...
침묵이 어색하지 않는 익숙하고 편한 사람,
이름을 불러 마주 웃어 보일 수 있는 사람,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다.
_ 20141013
오타쿠 _otaku : 한 분야에서 심취한 사람.
덕후 : 한 가지에 과도하게 열광하는 사람.
길 모르는 사람에게 약도를 그려주어야만 하던 때가 있었다. 내비게이션이나 스마트폰처럼 세련되고 간편한 기계가 없어서, 주소만 알아도 목적지까지 바로 갈 수 있는 지금과는 많이 다르던 때였다. 그때 젊은 청춘들은 굽이굽이 거칠게 돌아가는, 구식 약도 같은 사랑을 했다.
《길 위를 떠 도는 그때 그 시절의 사랑. 》中...
한 모금 들이켜는 순간 씁쓸하게, 그러나 감미롭게 혀를 감싸는 커피. 그 섬세한 입자는 상피 세포 사이로 번져 나가며 내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깨우고, 방 안 가득 진향을 남긴다. 그래서 커피는 사랑을 닮았다. 감미롭고 씁쓸하며, 온 몸의 감각을 날 서게 하고, 사방에 흔적을 남기는 사랑의 모습 말이다. 커피나 사랑이나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려운 건 매 한가지다.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푹 빠져, 중독되어 버린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사랑은 명사지만 누군가에게 고백하거나 전달할 때는 '사랑하다'라는 동사로 쓰인다. "사랑해." 그래서 그건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 당신에게 움직여 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사랑한다'는 건 사랑 받을 때 쓰는 말이 아니다. 사랑을 주고자 할 때, 내 마음을 내 보일 때 하는 말이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주는 것이다. 그게 마음이든, 위로든, 음식이든, 체온이든...
내가 갖고 있던 무언가를 나누어 줄 때 사랑은 피어난다.
하지만 언젠가 여유로운 날, 내가 좋아하는 당신들에게 커피 한 잔 내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식사가 끝난 후 나른한 볕이 창으로 비스듬히 비쳐 들어오는 오후 쯤이면 좋겠다. 직접 로스팅한 원두를 핸드 밀로 정성스레 갈아, 김 서린 포트의 물을 졸졸 따라 커피를 내릴 것이다. 그 안에 말하지 않은 내 마음 다 녹여낼 수 있다면 좋겠다.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지친 당신에게 이 커피가 힘이 되길 바란다고...
눈치 채지 못한 사이 푹 뺘져드는 커피처럼, 당신의 사랑 역시 그런 맛과 향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고마워서 감미롭고, 미안해서 씁쓸한 언제나 위로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내가 갖고 있던 무언가를 나누어 주는 것. 》中...
"그렇게 비교하는 거 진짜 싫어요. 내가 너무 못난 것 같고, 앞으로도 못난 인생을 살 것 같아요. 나도 다 생각이 있는데. 비교하기보다는 내가 뭘 하는지 지켜보면 좋겠는데..."
그때 나는 그 아이에게 특별한 조언을 해 주지 못했다. 다만 어른들도 마찬가지라고, 나도 비교 당하는 거 싫다고 격한 공감을 표하긴 했다. 누구나 비교 당하는 건 싫어 한다고, 비교하기 보단 오래 비켜봐 주길 원한다고 말이다.
식어가는 커피처럼, 세상엔 오래 겪어볼수록 다양한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다. 나이 들어가는 길거리에서 느껴지는 향수, 함께 늙어가는 애완견이 주는 정, 빈티지 가구나 찻잔의 아름다움, 매번 들을수록 달라지는 음악의 매력, 젊을 땐 무심코 지나쳤던 고전 소설의 한 구절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깨달음...
화려한 시절은 지났지만 오래될수록 그 깊은 매력이 배어나오는 것들이 좋다.
누구나 비교 당하기 보다는 오래 지켜보아 주길 바란다. 그건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어쩌면 삶의 비밀 중 하나일지 모른다. 존재의 본질은 비교에 있지 않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비교하고 우위를 정하는 대신 오래 지켜보면 그 댜양한 매력을 느낄 수 있으니까. 식어가는 커피 한 잔이 선사하는 다양한 맛을 느껴 본 사람이이라면 알 것이다.
《모든 아름다움에 이유가 있다. 》中...
홀로 즐기는 휴식은 평화롭다. 남의 눈 신경 쓸 일 없이 편히 앉아, 부드러운 음악과 향긋한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시간.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책을 읽고, 몇 시간이고 멍하니 몽상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눈을 돌려 나 홀로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러면 아주 조금, 외롭기도 하다. 이 달콤한 휴식을 같이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런 고요한 휴식을 함께 나눌 상대는 많지 않다. 세상에는 편안한 사람보다 낯선 사람이 훨씬 더 많으니까.
하지만 익숙하고 편한 사람과는 침묵 속에서도 어색하지 않다. 침묵이 신경 쓰이지 않아서, 때로는 둘 다 한 동안 말없이 있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나는 그렇게 고요한 침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관계, 휴식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관계가 좋다. 그건 낯섦과 불편함이 없는 관계, 그래서 평화로운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관계인 것이다.
언젠가 한 번역서를 읽다가 '천사가 지나간다'라는 표현을 알게 되었다. 여럿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거기 모인 사람 모두가 입을 다물어 잠깐 정적이 흐르는 순간을 일컫는 말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 말 저 말이 마구 겹친다. 어떤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어서 끊긴 말꼬리들이 어지럽게 날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엔 갑자기 고요해지기도 한다. 그 순간에 천사가 지나간 거라니, 그래서 움찔 입을 다문 것이라니 상상만으로 즐거웟 그 표현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홀로 즐기는 휴식은 평화롭지만 때론 외롭다. 그러나 둘이 즐기는 휴식엔 혼자만의 휴식에서 맛볼 수 없는 견고한 안전감이 느껴진다. 침묵 속에서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라면 무얼 하든 편안하니까. 그렇게 마음이 통하는 두 사람이 함께 조용히 커피를 마실 때, 그곳엔 천사가 지나간다.
《천사가 지나가는 순간, 멈추다. 》中.
옛날엔 알지 못하던 일상의 기쁨을 나이 들어 새로이 발견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침에 일어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본다든가, 고슬고슬 잘 지어진 밥을 먹을 때라든가, 주차를 한 방에 성공 했다든가, 행복해 날 뛸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미소가 지어지는 이런 날들, 참 좋다. 사소한 기쁨이다.
스누피란 놈은
찰리 브라운이 점 찍어 둔 예쁜 소녀를
늘 자신이 차지한다.
차지 한다고 해야 고작 그 애의 집에서 쿠기를 나눠 먹는 것뿐이지만
그게 스누피에게 중요한 거다.
찰리 브라운은 한이 맺혀서 나간다.
난 개를 진짜 사랑해 넌 쿠기나 얻어 먹으려고 찾아간 것 뿐이잖아
진짜 사랑을 원하는 사람에게 진짜 사랑을 주는 건
쿠키를 나눠 먹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그래서 소녀들은 쿠키를 먹으러 오는 스누피가 부담없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진짜 사랑 보다는
쿠키를 나누며 싹트는 사랑이 더 깊어질 수 있다.
스누피는 그걸 아는 놈이다.
그래서 개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
개집 지붕 꼭대기에 누워서 빈둥거리는 거다.
『스누피란 놈 _ 성미정 』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귀엽고 웃겨서 킥킥거리게 된다. 진짜 사랑을 주는 것보다는 다정히 쿠키를 나눠 먹는 게 더 쉽다는 걸 아는 스누피란 놈. 녀석은 사소한 일들이 기쁨을 준다는 걸 잘 안다.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시로 풀어낸 시인 역시 작은 것이 주는 기쁨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상수동 카페들은 쿠키를 나누며 사소한 기쁨을 즐기는 스누피란 놈을 닮았다. 아니 어쩌면 그건 사소한 기쁨이 아니라, 사소해서 기쁜 걸지도 모르겠다.
《수수한 매력이 전하는 사소한 기쁨. 》中...
좋은 사람들을 만나 알아가는 건 설레는 일이다. 그건 홍차의 맛을 알아갈 때의 설렘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는 홍차를 선물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조용하고 다정한 미소를 가진 사람에게는 실론을, 솔직 담백한 매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얼 그레이를, 강렬하고 뚜렷한 인상을 주는 사람에게는 아쌈을, 만날수록 깊은 마음을 헤아리게 되는 사람에게는 다즐링을 선물한다.
그렇게 나는 그곳에서 홍차를 알게 되었다. 홍차도 커피처럼 어디에서 자랐고 어떤 손길을 거쳤느냐에 따라 다양한 맛을 담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홍차의 세계로 통하는 신비한 주문은 2,4,3 이라는 것도 알게됐다. 2그램의 차에, 400(cc)의 물, 3분의 기다림. 이것이 가장 향기로운 차를 만날 수 있는 암호였다.
처음 만났을 때 선생님은 덜 우려진 차처럼 조용히 미소만 짓는 분이었다. 하지만 차를 배우는 동안, 정확한 시간에 가장 섬세하게 우려진 차를 닮은 분이라는 느낌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좋은 사람 만나 알아가는 데서 느끼는 기분 좋은 설렘은 다양한 색과 향을 내는 홍차를 맛보는 느낌과 닮아 있었다.
이제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흘러 내렸다. 비로소 찻잔을 들어 오후의 홍차를 마실 시간이다. 이렇게 마시는 오후의 홍차는, 조용하고도 지극한 사치다.
《마음이 정갈해지는 조용한 오후의 사치. 》中...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그 상대를 오래도록 관심 갖고 지켜보게 된다. 찻 숟가락을 올리는 몸짓 하나, 웃을 때 올라가는 입가의 모양, 말꼬리를 길게 빼는 말투...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듯 열심히 그를 들여다 본다. 그러다 보면 그이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듯, 사소한 습관과 취향까지 모두 기억하게 된다. 그런 기억은 몇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랑은 어쩌면 한 사람을 기억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커피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장인이나 덕후들은 커피를 꼭 이렇게 마셔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세운 제일 강한 주장이라야, 이러이러한 편이 내겐 좀 더 맛나더라, 그쯤이었다. 그들은 커피의 이름이며 특징을 떠나 네가 가장 맛있는 방식으로 마시라고 말하곤 했다. 내 입맛대로 남의 취향을 조절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 바로 사람을 대하는 기본 자세임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남과 다른 내 취향을 인정해 주는 것을 넘어, 그것을 세세히 기억해 주기까지 할 때 우리는 감동하게 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일부러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그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담아 마음 깊이 새기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세세한 취향도 인정하고 기억해 준다. 그것이 바로 관심과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과 다른, 나와 다른 그의 고요한 의미를 다 헤아려줄 때, 그 관계엔 꽃이 피어나게 마련이다.
나는 이따금 별 이유없이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본다. 그러면 그가 나를 돌아보는 동시에 그 이름에 담긴 특별한 의미, 그 이름의 주인이 품고 있는 사소한 습관과 취향까지도 함께 피어나 나를 돌아본다. 간지럽게 왜 계속 부르냐며 활짝 웃는 그들의 얼굴까지도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마주 웃어 보인다. 꽃이, 피어난다.
《사랑은 어쩌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일. 》中...
바라보다 : 바로 향하여 보다.
사랑은...
내가 가진 무언가를 나눠 준다는 것.
오래도록 지켜 보는 것.
남과 다른 취향을 인정해 주는 것을 넘어 기억해 주는 것.
중독되어 가는 것.
함께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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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불러 마주 웃어 보일 수 있는 사람,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다.
_ 201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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